이자익 목사는 남해 출신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을 세 번이나 역임한 한국 개신교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을 가지고 계신 분이다. 그렇게 총회장을 지내면서 법과 질서 그리고 겸손함으로 교회를 섬겼다고 전해지고 있다. 종교를 뛰어넘어 그분의 행적을 살피는 것만으로도 법과 원칙 보다는 이익과 편법이 판을 치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큰 교훈을 주실 수 있기에 그 분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자익 목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집안 형님 부경대 명예교수이신 장수호 교수님의 이야기 때문이다. 장 교수님은 이자익 목사와 인척관계가 되어서 어린 시절에 상당히 왕래가 있었다고 했다. 그분의 증언에 따르면 이자익 목사는 장천 이씨로 이동면 석평리에서 태어났으며 이자익 목사의 동생 분은 이동면 석평리 용머리 글씨모퉁이에 사셨는데 친척들과 함께 여수로 이사를 가셨다고 했다. 그 형님의 조부 되시는 분이 이자익 목사와 외사촌간이 되신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분의 증조모님이 이자익 목사의 고모님이 되시는 것이다. 이 글을 쓴 목적은 이자익 목사와 같은 훌륭한 분이 남해에서 태어나셨는데도 요즈음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다음 글은 주로 인터넷에 떠도는 이야기에 기초를 두고 썼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다.
이자익 목사는 1879년 7월 25일 경상남도 남해군 섬마을에서 출생하였다. 그리고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고아가 되어 가난하고 배고픈 생활을 하였다. 그는 일자리를 구하기 위하여 육지로 올라와 전라북도 김제에 이르러 지주 조덕삼의 집에 마부로서 일을 하게 되었다. 그의 나이 17세의 일이었다. 이자익의 인간성은 성실, 근면, 충성으로 요약해 볼 수 있다. 그의 성실성은 주인 조덕삼의 눈에 들게 되었고 집안의 많은 하인들이 있었지만 조덕삼은 이자익을 총애하였다. 이자익은 또한 근면한 사람이었다. 학교교육을 받지 못한 이자익은 주인의 배려로 장남인 조영호가 공부하는 것을 어깨너머로 배울 수 있었고, 한문과 한글을 깨우쳐 오늘날 일기를 비롯한 많은 기록들을 남기고 있다. 그리고 이자익은 충성스런 사람이었다. 주인이 예수를 믿자 그는 주인이 믿는 예수를 같이 믿기로 결심하였다. 그리고 제2의 주인 격인 테이트(Lews Boyd Tate, 최의덕) 선교사 곁에서 충성스럽게 교회를 섬기고 봉사하였다. 이자익은 지주 조덕삼으로 부터 사람을 대하는 인격과 사랑을 배웠고, 테이트 선교사로부터는 법과 원칙에 따라서 교회 조직을 다스리는 행정과 정치를 배웠다. 이는 모두 이자익의 성실과 근면과 충성이 가져다준 선물이었다.
1907년 여름 금산교회는 테이트 선교사의 사회로 공동의회를 열고 장로 선출 투표를 하였다. 모두들 조덕삼이 장로가 될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결과는 이자익이 장로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이 일로 인하여 교회는 아무런 풍파가 없었다. 이는 먼저 조덕삼의 훌륭한 신앙과 인격 때문이었다. 그는 자기 집 머슴인 이자익을 장로로 세우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는 참 신앙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었다. 당시에 장로는 설교도 하였는데 지주인 조덕삼이 이자익 장로의 설교를 즐거운 마음으로 들었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조덕삼은 그 후에도 과수원 땅을 교회에 헌납하고 돈을 들여서 지금의 기역자(ㄱ) 예배당을 짓도록 헌신하였으니, 이는 그의 마음에 자신을 선택하지 않고 이자익을 택한 교회 교인이나 테이트 선교사에 대한 조금의 서운함도 없었다는 증거이다. 이자익은 장로가 된 후에도 주인에게 절대로 교만하지 않았고, 공사(公私)를 분명히 하여 예전보다 더 충성하며 섬겼다고 한다.
/장원도 부산 향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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