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입국, 16일 가족들과 눈물의 상봉 
“민족의 자주와 조국의 통일 위해 여생 바칠 터”



“조국과 민족을 사랑만 해서는 안 된다. 온몸으로 그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시대의 상황과 민족의 관계에 따라 우리의 실천과제도 변한다. 일제시대의 민족의 과제가 독립이었다면 분단시대에는 통일이어야 한다”

“분단체제가 군사독재를 낳았고 나는 그 군사독재에 맞서서 싸웠다. 그래서 꿈에도 그리던 고향을 이제야 온 것이다. 나는 나의 길이 옳았다는 것을 확신한다”

 
 
    사천공항에 도착한 곽동의 고문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는 형제 곽영규씨.
 


곽동의!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이하 한통련) 상임고문. 44년만에야 고향에 올 수 있었던 사람. 우리는 이제 그에 대해 제대로 알고 그를 기억할 때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지난 군사독재정권이 자랑스런 우리 군민의 한 사람인 그를 우리가 제대로 바라볼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 조국과 민족의 아픔을 온몸으로 껴안은 사람이다.

 
 
반갑게 얼싸안은 형제가 고향 남해로 오기 위해 사천공항의 문을 나서고 있다.
 
우리나라는 한 사람이 자신의 신념 때문에 핍박을 받았던 암울한 시대가 있었다. 일제시대였던 1930년 남해읍 북변리(현 청수탕 뒤쪽)에서 태어난 곽동의씨. 장손이었던 부친은 누나와 그를 남겨두고 먼저 세상을 버렸다.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모친마저 세상을 떠나 그는 할머니 품에서 사촌형제들과 함께 길러졌다. 남해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구사범학교와 진주농림학교(진주산업대의 전신)를 나와 20세가 되던 1948년 일본 리츠메이칸대로 유학을 갔던 청년, 그 청년이 32살이었던 1961년 5월 16일 조국에서 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고향의 산천해를 보기 위해 형제들은 물미도로를 귀향길로 선택했다. 대지포 약수터에서
약수를 마시고 있는 곽 고문.
 

곧 본연의 위치로 돌아가겠다던 쿠데타세력은 본연의 위치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조국의 군사정권을 인정할 수 없다는 선언을 했다. 조국의 군사정권이 사람을 보내 그를 설득했지만 그는 굴복하지 않았다. 그 길로 그는 조국의 군사정권으로부터 입국금지대상이 됐다.


  
 
  
남해신문 동영상팀이 동행취재를 하면서 고향에 오신 소감을
묻자 그는 한참 동안 하늘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64년인가 하나밖에 없는 혈육인 누나마저 돌아갔을 때, 그는 입국신청서를 냈다. 군사정권은 그에게 “앞으로는 절대로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내밀며 손도장을 찍으라고 요구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조국 고향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신념을 꺾으면서 누나에게 간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누나는 내가 그런 모습으로 자기 옆에 오면 야단을 칠 사람이다. 나는 떳떳하게 내 신념을 지키겠다. 그게 누나를 위하는 길일 것이다’그는 그 자리에서 여권을 찢어버렸다.

 
 
그의 고향방문을 수행한 사람들과 맞이한 사람들이 남해 바다를 배경으로 기념촬영
을 했다.
 

1973년 한통련의 전신인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이하 한민통, 초대의장 김대중 전 대통령)일본본부가 결성됐다. 그는 한민통의 조직국장에 이어 사무총장까지 맡았다. 

 
 
곽동의 한통련 상임고문. 75세인 그는 아직도 건강한 모습을
지키고 있었다.
 

군사정권이 일본을 방문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납치해 현해탄에 수장하려 했을 때에도, 박정희에 이어 등장한 신군부 세력이 김 전 대통령에게 내란음모죄를 뒤집어 씌워 처형하려 했을 때도 그는 미국 정부는 물론 전 세계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옹호하는 단체들을 상대로 정열적인 구명운동을 벌였다.    

  
 
  
80년 당시 남해군 재무과장이었던 곽영규씨.
그는 어느날 아침 면직통보를 받았다.  
                  
  

그런 그를 조국의 군사정권이 반길 리 없었다. 그가 이끄는 조직에 조국의 군사정권은 반국가단체라는 낙인을 찍어놓았다. 그 후로 그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인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여권을 신청하지 않았다. 형제들에게는 가급적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

그 반국가단체의 구성원인 자신 때문에 고향에 있는 형제들이 하루아침에 공직에서 쫓겨나고(현재 남해여객 전무인 동갑내기 사촌형제인 곽영규씨는 1980년 당시 남해군 재무과장이었지만 면직통보) 또한 옥살이(곽영규씨의 동생 영우씨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당시 11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다고 함)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생살을 찢는 것과 같은 고통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2004년 10월 16일 오전 11시 10분. 44년 4개월만에 고향을 찾아오는 곽동의씨가 사천공항에 발을 디딜 시각이다. 그는 지난해 해외민주인사 고국방문 행사 때 고향으로 올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나 하필 고국 방문을 앞두고 건강이 악화되는 바람에 후일로 미루어야 했다. 올해는 조국의 민주인사들이 ‘한민통 명예회복 및 고국자유왕래를 위한 대책위원회’를 꾸려 한민통 회원들을 고국으로 초대하는 행사를 마련했다. 그는 한통련 회원 144명과 함께 지난 10일 입국했다.


  
 
  
사촌동생 곽영우씨. 그는 80년 당시 아무 이유도 모른채 11개월     
동안이나 옥살이를 해야 했다.
 

여장은 남해스포츠파크에 풀기로 했다. 할머니와 함께 살았던 고향집(현재는 곽영규씨가 살고 있음)에는 내일 아침에 들러 가족들이 함께 식사를 하기로 했다.

저녁에 여장을 푼 스포츠파크호텔에 남해지역운동연대회의(의장 박정두) 등 사회단체들이  조촐한 환영행사를 마련해주었다. 그는 고향의 후배들에게 고향에 온 회포를 얼기설기 말하기보다 조국과 민족의 과제에 대해 이야기했다. “조국의 해방된 지 60년이 되는 내년을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여는 원년으로 삼자! 나는 여생을 조국의 자주와 평화적 통일을 위해 바치겠다”고 했다.


 
 
고향에서 지역운동을 하고 있는 단체 회원들이 마련한 환영행사에서 곽 고문이 인사를
하고 있다.
 

한통련의 상임고문으로서 그의 고국방문활동 일정은 빡빡했다. 환영행사 참석, 광주민주항쟁묘지 참배, 김대중 전 대통령 방문, 민주노동당 방문, 조선일보 반민족행위 처벌 민간법정 진행 등 빡빡하게 짜여진 일정 때문에 16일에야 진정한 고향 남해방문 일정을 잡을 수 있었다.   
 

 
 
                        조국과 민족의 현실, 그 속에서 젊은이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그는 진지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를 위해 사천공항에 마중을 나온 고향의 혈육 곽영규씨는 그보다 3개월 늦게 태어난 동갑내기 사촌지간이다. 어릴 때 집안의 장손으로서 할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동의, 그리고 쌍둥이처럼 자랐던 두 형제, 사천공항 대합실로 들어서고 맞이하는 두 형제는 드디어 서로를 얼싸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살아서는 만날 수 없으리라 여겼는데 이렇게 만나다니 꿈만 같구나, 너도 백발이 다되고 나도 백발이 다 되었다. 살아서는 만날 수 있을까 애태운 지 얼마냐’

승합차에 오른 형제들은 고향으로 들어오는 길을 창선-삼천포대교 쪽으로 잡았다. 그는 삼천포대교 쪽에 차를 세우고 고향 남해의 바다를 한참 동안 응시했다. 형제들은 남해에 이르는 길이 또 하나 생겼으니 올 때는 창선-삼천포대교를 보고 나갈 때는 남해대교를 보시라고 배려했다. 지족의 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난 형제들은 물미도로를 따라 돌면서 대지포의 약수터에 차를 세우고 약수도 함께 마셨다.

‘나의 고향이 이렇게 아름다웠던가! 우리 형제의 가슴에 맺힌 한이 깊지만 고향 땅을 밟으니 그 한조차 눈 녹듯 하는구나’

미조항에 내려서는 갈치 회도 한 사발 했다. 어느 젊은 청년이 그를 알아보고는 그의 손을 잡아보기를 원했다.  

그를 수행한 교포3세인 손형근 한통련 부의장은 그를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라면서 “위대한 지도자의 고향에 온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옛 고향집에 들어서면서 옛날을 추억하는 곽동의 고문.
 

17일 아침 형제들은 할머니가 앉아 계셨던 고향집 안방에 함께 앉았다. 할머니에 대한 추억이야말로 형제들의 공통분모였다. 할머니에 대한 추억이 숟가락에 얹히자 형제들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그는 손에 손수건을 들고 밥을 먹었다.

 
 
         할머니가 앉아 계셨던 자리. 그 자리에 앉아서 곽 고문은 끝내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이어 할머니의 묘소를 찾아 술잔을 받치고 절을 올린 그는 할머니의 봉분을 온몸으로 얼싸안고서 오랫동안 통곡했다.



 
 
 

오후에 그는 살아서 보지 못했던 누님의 묘소가 있는 진주로 향했다.

19일 오후 일본으로 돌아간 그는 형제들에게 전화를 걸어 “고국의 일정이 빡빡해 강행군을 했지만 고향을 찾은 기쁨 때문에 하나도 피곤하지가 않다”고 말했다고 한다.

 
 
                   할머니의 묘소 앞에서 울음을 삼키고 있는 곽동의 고문.
 

지역의 사회단체 활동가들에게 “여생의 5년은 고향에서 살고 싶다”고 밝힌 그는 내년 5월 다시 고향을 찾을 예정이다.
저작권자 © 남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