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또다시 이들의 뇌리에 아픈 기억이 떠오르는 계절이 돌아왔다.

주변 산천초목은 여름의 초입을 알리는 신록으로 물들어 눈이 아리건만, 이들 세 분의 6·25 참전용사들에게는 늘 가슴 한 켠이 아려오는 색(色)이다.

이마와 눈가에 깊은 주름이 패이고 백발이 성성한 이들 세 분의 참전용사를 만난 자리, 지난해 이 자리를 지켰던 6·25 참전유공자회 여주대 회장은 건강이 좋지 않다 했다. 여 회장의 자리는 여 회장의 직무를 대행하고 있는 정한규 6·25 참전유공자회 부회장(이동면 초양)께서 대신 자리했다. 지난해 이 시기, 이 자리에서 뵀던 무공수훈자회 김달기 회장(고현면 이어)은 여전히 정정한 모습으로 올해도 남해신문과의 인터뷰 자리에서 다시 반갑게 재회했다. 이들과 함께 한 자리에는 남해군 상이군경회 정재득 회장(서면 노구)과 남해군재향군인회 구재모 회장, 정용수 사무국장도 함께 했다.

▲“전쟁이 우리 집안을 송두리째 앗아갔다”

이들 세대 어느 누구에게나 기억은 같으리라. 이들 기억 속의 1950년 6월은 너무나 힘든 시기였다. 이들의 기억 속에 자리한 그 때의 기억을 더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주 잠깐 숨을 고르던 정한규 부회장이 1951년 그 때로, 강원도 고성 향로봉 옆 금봉산 전선으로 기억을 되짚어 나갔다. 그의 나이 21살 때였다.

잠깐 숨을 고르고 처음 그가 내뱉은 이야기는 “전쟁이 우리 집안을 송두리째 앗아갔다”는 말이었다. 정 부회장과는 7살 터울이던 큰 형님 정상규 씨와 4살 터울의 작은 형님 정인규 씨(모두 작고), 그리고 정 부회장까지 삼형제 모두가 전선(戰線)에 뛰어들었다.

“집안이 말이 아니었지…. 그나마 조금 세간이라도 꾸리고 살던 집이 그 때 그만 가세(家勢)가 기울고 말았어. 형제 중 하나만 전쟁에 나가도 뭐할 판국에 형제 셋이 다 전쟁통에 나가 있으니 어떻게 집안이 성할 수 있겠어”.

전쟁은 반세기를 훌쩍 넘긴 세월이 흘렀음에도 아직 이들에게는 아픔과 고난을 이어주고 있었다.

▲“전쟁,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다시 있어선 안 돼!”

정한규 부회장의 기억의 끈을 김달기 무공수훈자 회장이 이어 받았다.

“낮에는 ‘대한민국 만세’ 소리가 온 천지서 울려 퍼졌고, 밤이면 총성과 포성이 가득 했어. 전선 이 곳 저 곳에서 오늘은 어디 연대, 어디 대대가 ‘녹았다’더라는 소리가 들렸고, 언제 우리도 ‘녹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가득 했지.”

김 회장은 남과 북이 서로 대치하며 밀고 밀리는 공방에서 아군이 전사하고 밀려난 것을 ‘녹았다’라는 표현을 썼다. 실제 이 표현은 당시 전쟁에 참전한 이들 사이에서 생겨난 일종의 은어였다.

“자유민주주의니 공산주의니 하는 이념은 지금도 잘 모르겠어. 다만 그 때 생각에는 일제 치하에서 내 나라 없는 설움을 겪었기에 나라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컸고, 아무래도 공산주의보다는 내 마음대로 내 뜻대로 하고 싶은 일 하는 ‘자유’라는 말이 붙는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던 거 같아.”

김 회장의 나이 만 20살, 6월 발발한 전쟁 3개월 뒤인 9월 남해도 공산군의 군홧발이 닿았고,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까지 약 1개월여 남해는 공산 치하에 있었다 했다.

그리고 1950년 11월, 김 회장은 딱 2주에 걸친 기초훈련만 받고 통신병으로 동서남북 전국의 전장을 오갔다. 1950년 11월부터 1953년 7월, 정전협정이 체결되던 날까지 60여년전 그 때 그 일을 바로 어제 일처럼 기억하는 김 회장이었다.

김 회장의 회상 끝 말맺음은 늘 “전쟁, 그거 정말 무서운 거야. 절대 전쟁은 다시 있어선 안 돼”라는 말이었다.

▲ 좌측부터 남해군 6·25 참전유공자회 정한규 부회장, 남해군무공수훈자회 김달기 회장, 남해군상이군경회 정재득 회장

▲“전쟁이 끝나도 여전히 쓰라린 상흔”

60여년 전 있었던 전쟁은 그것으로 끝난게 아니었다.

“25사단 전투공병대에 있을 때였어. 워낙 치열한 전쟁이었던 탓에 정전 후 십 수년이 지났지만 늘 전장이 있던 곳은 곳곳에 지뢰가 가득 했고, 제대할 날을 얼마 앞두고 지뢰제거 작업을 나갔지…. 그 때 쾅 하더니 옆에 동료 네 명이 그 자리에서 숨을 거뒀어요. 나도 그 때 입은 부상으로 농사 짓는 것도 기계 아니면 힘들고, 심지어 집안 제삿날 조상들한테 절도 못하는 상황이 됐네.”

씁쓸하게 웃으며 말하는 남해군 상이군경회 정재득 회장.

전쟁은 그런 것이었다. 정 회장의 말대로 “왜 그 때, 하필 그 때 우리 부모가 날 낳았을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전쟁은 이들의 뜻도 이들이 하고 싶어서, 겪고 싶어서 겪은 일이 아니었다.

60여년 전 일어난 동족상잔의 비극은 지금도 여전히 이들의 기억에 쓰라린 상흔으로 깊숙이 남아 있었다.

▲“가슴에 단 배지, 이게 부끄러울 때도 있었다”

“나는 그래도 살아 돌아 왔잖아. 늘 매년 6월이면 미안한 마음이 들어. 젊은 나이에 제 뜻 펴보지도 못하고 먼저간 전우들, 특히나 사랑하는 남편을 잃고 평생을 고생하며 살아온 전몰군경 미망인들에게 제일 미안하지….”

팔순이 넘은 고령에도 너무나 명확하고 또렷한 음성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던 김달기 회장의 목소리가 떨렸다.

“전쟁…. 그 때 고생한 거 너나 할 것 없이 고생했으니 ‘내가 더 고생했소’라고 하는 건 말도 안 돼. 누구는 ‘훈장까지 받았으니 더 고생했겠지’라고 하지만 생사(生死)가 오가는 전쟁을 겪은 이들에게는 누가 더 고생하고 안 하고는 아무 의미 없어. 영웅이라 불러주는 것도 바라지 않아. 내 공을 좀 알아줬으며 하는 마음도 없어.”

여기까지 얘기를 이어가던 김달기 회장이 양복 상의 깃에 달린 무공수훈자회 배지를 잠시 내려다 봤다.

“몇 년 전에는 이 배지도 달고 다니기 부끄러워서 달지도 않았어. 너나 할 것 없이 다 고생하며 생사를 넘나들었는데 배지 달기가 좀 면구스럽더라고…. 그러다 몇 해 전부터 함께 전쟁에 나섰다 살아 돌아온 전우들이 하나둘 세상을 뜨는 걸 보면서 ‘누가 인정해 달라는 건 아니지만 함께 전장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한 이들을 살아 있는 나라도 기억해주기를 바랄 수 있겠다는 생각에 배지를 다시 달고 다니기 시작했어.”

그랬다. 매년 약 60여명 정도의 참전용사 어르신들이 운명을 달리한다.

아직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기억에는 어제 일처럼 생생하기만 6·25 전쟁의 기억은 전후세대, 젊은 세대들에게는 먼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들린다.

예능프로그램에서 역사교육의 중요성을 이야기 해야 알고, ‘6·25 전쟁’이나 ‘3·1절’을 ‘6점25 전쟁’, ‘삼점일절’로 읽는 요즘 청소년들. 그 소식들을 뉴스로 접하면서 가슴이 먹먹할 정도로 서운한 생각이 들더라는 이들이다.

다음주 25일, 6·25전쟁 63주년 기념 군민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에 정한규 부회장이 한 마디 툭 하고 던진다. 그 한 마디에 담긴 울림이 뇌리에 와 박혔다.

“이제 다들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팔순 ‘송장’들인데…. 2~3년 뒤에는 행사 나올 사람도 없겠어…허허”

이들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휴대전화 뉴스 알림 창에 적힌 기사 제목이 더욱 가슴을 후벼 팠다. ‘국회의원 수당은 월 120만원, 참전용사 수당은 고작 12만원’.

‘당신들이 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다’는 호국보훈의 달 포스터 문구. 과연 이들 세 분에게 저 문구는 어떤 의미로 읽힐까…. 고개가 갸웃 거려졌다.

또 다시 6월, 매년 돌아오는 6월의 어느 날은 또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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