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과의 전쟁에서 팔레스타인 장수 골리앗은 누구든 자신과 일대일로 결투를 해서 이긴 나라가 상대방을 노예로 삼자고 큰소리친다. 키가 3m에 달하는 거인의 기세에 눌려 아무도 나서려 하지 않을 때 양치기 소년 다윗이 나섰다. 양을 보호하기 위해 쓰던 무릿매와 돌멩이 다섯 개만 들고 나간 다윗은 단 하나의 돌멩이를 날려 골리앗의 이마를 맞추어 쓰러뜨리고 전쟁에서 승리했다. 다윗은 고대 이스라엘의 제2대 왕이 되었다.
흔히 힘의 균형이 전혀 맞지 않는 불공정한 경기를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 비교하기도 한다. 하지만 다윗과 골리앗도 ‘단 둘이 자신에게 알맞은 무기를 들고 싸운다’는 규칙이 있었다.
그런데 최근 화력발전소 유치 문제와 관련된 논란에는 최소한의 규칙도 무시한 전횡이 벌어지고 있어 군민들의 혼란과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
남해군은 처음 화력발전소 제안을 할 때 공정하고 객관적 정보를 전달하고 군민의 뜻을 묻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는 처음부터 거짓말이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정현태 군수는 토론회가 열리기도 전인 7월29일 각 읍면장을 모아 놓은 자리에서 ‘80% 이상의 찬성 여론을 끌어내 줄 것’을 독려한 바가 있다. 본지는 군민들의 정확한 판단을 구하기 위해 토론회를 준비하고 있는데 정 군수는 자신의 약속과는 달리 뒤에서 일을 꾸미고 있었던 것이다.
군청 팀장이 읍면장들에게 ‘압도적 찬성 독려와 유치위원회의 읍면위원장들을 물색하라’는 지시성 전자문서를 보내고, 각 마을별 담당공무원까지 정해서 찬성여론을 조성하더니, 이것이 들통나자 그동안 쓰고 있던 탈을 벗어 던졌다.
21일 열린 유치위원회 출범식에 참석한 정 군수는 아예 대놓고 “역점사업에 공무원이 발벗고 나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중립을 지키라는 것은 복지부동하라는 얘기”라며 공무원들의 개입을 정당화하고 나선 것이다.
어떤 사업이든 찬성과 반대의 목소리는 당연히 나오게 되어있다. 그래서 남해군은 표면적으로 공정하고 객관적 정보를 전달하고 군민들의 의견을 구하겠다는 방침을 정한 것이고 언론사들은 찬반 양론에 대한 토론회를 개최한 것이다. 그런데 군민의 의견을 구하겠다던 남해군이 찬성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유치위원회를 직접 조직하고 군수가 나서서 찬성하라고 구호를 외치며 선동하는 것은 규칙을 무시해도 한참 무시한 행태이다.
다윗과 골리앗, 둘이 싸우는데 갑자기 팔레스타인 군대가 다윗을 향해 화살 무더기를 날리는 꼴이다.
애초에 공정한 정보전달은 시도되지도 않았다. 지난해 남해군이 스스로 요구했던 6개항의 동의조건은 어느 하나 제대로 보장되었다는 근거가 없다. 남해군은 이 중 하나라도 어긋나면 없었던 일로 하겠다고 큰소리 쳤지만 지금은 슬그머니 감추고 있다.
이런 와중에 모 지역신문은 화력발전소 유치의사를 묻는 여론조사를 해서 발표하겠다고 해서 반발을 사고 있다. 본사와 서경방송 주최의 토론회에 대해 근거없는 비방을 늘어놓고 남해군의 이같은 여론몰이에는 일언반구 않던 신문이 공정한(?) 여론조사를 하겠다고 나서니 저지대책위 쪽에서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반응이다. 게다가 발행인 이름의 컬럼에는 남해신문을 비꼬는 투의 글로 찬반양론을 전형적인 ‘양비론(兩非論)’으로 몰아가고 있다. 양비론은 힘의 균형이 현저히 맞지 않고 규칙이 무시된 상황에서 힘의 우위를 가진 쪽에서 등장시키는 전형적인 수법이다. ‘이익과 피해에 대해 정확히 알려주고 군민이 결정하도록 해야 한다’ 주장은 가장 힘이 센 군청과 공무원들이 전혀 들어주고 있지 않는 상황을 비판하지 않는 전제라면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또 이미 현저히 불공정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데 여론조사라는 명목으로 군민들의 생각을 사전조사한다는 것도 앞뒤가 맞지 않다. ‘이익과 피해를 알려주는 시간을 빨리 가져야 한다’는 주장은, 아직 이런 시간을 갖지 못했다는 뜻인데도 여론조사를 하겠다는 것은 공무원들이 전방위적으로 움직여서 조성된 여론에 쐐기를 박아주는 것이란 대책위의 주장이 와닿는다.
다윗과 골리앗이 싸우기도 전에 갑옷도 입지 않은 다윗의 유일한 무기인 돌멩이를 훔쳐 가버리는 모양새다.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라고 강요하기 이전에 다른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자리가 먼저 보장되어야 한다. 이것이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고 ‘똘레랑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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