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방사 수광암의 돌담 
  


흔히 남해의 산 하면 먼저 보리암이 있는 금산을 떠올리지만 산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다르다. 남해에서 가장 높은 망운산은 금산처럼 자동차를 이용하면 노구나 중리 마을에서 단숨에 오를 수 있지만 사실 그런 산행은 무모할 뿐 아니라 별 의미가 없다. 사람들은 망운산 하면 5월 바다를 향해 다투어 피는 철쭉꽃의 군락을 떠올리지만 개인적으로는 꽃보다는 봄 풀이 아름답고 봄 풀보다는 만추의 단풍과 은빛 바다를 이루는 갈대가 더욱 아름답다. 아니, 모두 비우고 맨몸의 수행자를 떠올리는 겨울 산은 적요한 아름다움에 숭고하고 경이롭기까지 하다.

이번 나의 산행은 고현면 대곡마을에서 화방사 뒤편으로 올라가는 길을 택했다. 화방사 입구의 현대식으로 지어진 뒷간 입구에는 ‘근심을 푸는 곳’이라는 나무에 새긴 현판이 행자를 반긴다. 그날 산행에 동행해주신 허 선생님은 화방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맞은편 수광암으로 기꺼이 나를 안내하셨다. 거기 맑은 스님 한 분 계시는데 들러서 차 한잔 나누고 갔으면 한다는 청이 있은 후였다. 암자로 오르는 길은 완만한 경사를 안고 숲의 소로를 따라 돌과 기와를 겹쳐 쌓은 담이 눈을 즐겁게 한다. 한낮이었지만 법당 안에는 깊고 맑은 정적이 감돌고 마당에는 작은 샘이 물소리를 내고 툇마루에는 망사 같은 겨울오후의 햇살이 저 혼자 놀고 있다.

욕심 같아서는 산행을 뒤로 미루고 한나절 툇마루에 앉아 귀는 화방사 풍경소리를 듣게 하고 눈은 건너 편 옷을 모두 벗은 늙은 철학자를 닮은 겨울 숲이나 하염없이 바라보며 햇살을 벗삼아 놀고픈 마음 굴뚝같았으나 내겐 그럴 시간이 없었다. 아래 마을에서 점심을 한 후에 출발했기 때문에 12월 겨울 짧은 해에 떠밀려 스님이 안내해주신 방으로 들어 차 한잔하며 세속의 일과 스님의 수행을 소재로 담소가 익을 무렵 아차 하며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스님은 정진 중이셨고 세속의 우리들은 우리들대로 일이 있었기에 헤어질 수밖에. 짧은 시간이라 아쉬움은 더했지만 스님의 절제된 말씀과 잘 우려낸 차 한잔 얻어 마시는 것으로 서운한 마음을 달래야 했다. 우리들 못지 않게 스님께서도 아쉬웠는지 산에 오르며 들라고 녹차사탕 한 줌을 쥐어주신다. 동행해 주신 허 선생님의 뒤를 따르며 산에 오르는 동안 입안에서 천천히 녹아 스미는 사탕 맛이 스님의 말씀 같았다.    

화방사의 정적을 뒤로하고 산닥나무 자생지를 지나 오르는 길은 시작부터 이질감이 전혀 없다. 가다보니 쌓인 낙엽에 발목이 빠지는 곳도 있고 큰 바위더미가 길을 막고 선 너덜지대도 있었다. 길은 경사가 적고 완만할 뿐 아니라 겨울이라 산은 하늘과 땅, 제 가슴 모두 드러내어 어느 한 곳도 마음의 눈 가리지 않으니 여느 계절에 비하면 산 전체를 그대로 만끽할 수 있어 시야가 밝아 속이 후련하게 뚫리는 기분이다.

  
 
  
산닥나무 자생지로 오르는 등산로 
  


망운암을 지키는 고양이

돌무덤이 길을 막는 너덜지대를 지나 정상을 얼마 두지 않은 길목에 암자 하나가 나타났다. 망운암이다. 시간에 쫓겨 샘의 물소리를 듣고도 못들은 척 그냥 지나치는데 암자를 지키는 작은 고양이 한 마리가 발목을 잡는다. 녀석에겐 내려올 때 말이라도 걸어 주기로 하고 조금 더 속도를 내 올라서니 바람은 차고 강하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곧 정상이다. 정상은 이쪽과 저쪽의 경계를 확연하게 하는 중심이라 동시에 내려갈 때는 언제든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정점임을 의미하지 않던가. 둘러보니 멀리는 지리산 자락과 가까이는 남해읍과 강진만, 여수와 삼천포항까지 볼 수 있고 눈앞은 서상 앞 바다다. 황망한 능선 아래 봄 산에 흐드러지게 핀 철쭉의 붉은 꽃바다를 마음 안에 그려보며 넓은 바위에 올라가 사방을 살핀다. 모두가 발아래 있지만 심호흡 몇 번으로 다 품고 가질 수는 없다. 그래서 산이란 고개 숙여 굴복하며 다시 오리라 다짐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

  
 
  
망운산 오르는 길에서 본 전경 
  


모든 하산이 그러하듯 내려오는 길은 해떨어질 시간이 임박해 마음이 바쁘다. 그러나 아무리 바빠도 내려오는 길에 망운암을 지키는 고양이를 외면할 수는 없다. 물 한바가지 마시고 숨을 고르는 동안 고양이는 사람을 경계하지도 않고 주위를 맴돌다가 추위를 피해 장작이 타고 있는 아궁이 위에 올라가 몸을 웅크리고 있다. 허 선생님께서 다가가 눈을 맞추며 뭐라고 말을 건네는데 둘은 마치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 같다. 사람과 짐승의 언어가 아니어도 둘은 살아있는 그 자체로 충분히 교감했으리라. 화방사 입구에 닿으니 어둠은 더욱 진하고 가파르게 비탈을 내려와 땅에 엎드린다. 해우소에 들러 쌓인 근심을 풀고 보니 모두가 내 마음 안에 있다는 걸 거듭 확인하게 된다. 읍에 들러 간단한 찬거리를 챙겨 숙소로 돌아오는 길은 조금 추웠지만 넉넉했다

/ 김인자(시인·여행가) http://www.isibada.p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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