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광 석 본지 편집인                          
  
5월 10일은 남해신문이 창간된 날이다.

창간14주년 특집호를 준비한답시고 거기에 정신을 팔다보니 고 문신수 선생의 2주기가 다가온 것을 깜빡 잊을 뻔했다.

선생이 우리 곁을 떠난 날은 양력으로는 5월 11일이고, 음력으로는 3월 29일(올해는 5월 17일)이다.

그러니 가족들은 아마 16일 저녁 서면 작장마을 고인의 유택에서 제사를 지내게 될 것이다.

본지 창간일과 선생의 기일이 하루차이 상관이니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일인데도 깜빡 잊을 뻔했다는 게 선생님께 죄스럽다.

선생은 본지 창간호에 ‘하늘의 소리 땅의 목소리’라는 제목의 논단을 실으셨다. ‘붓을 든 사람에게’라는 부제를 단 논단을 통해 선생께서는 새로 출발하는 남해신문에 이렇게 당부하셨다.

「하늘의 소리는 성현의 말씀, 곧 진리요, 땅의 목소리는 만백성의 소리이니 이제 붓을 들고자 하는 남해신문 기자들이여, 소리 없는 말, 말 없는 소리를 듣고 적어서 세상사람에게 전해주는 사람이 되라! 마음에 특수장치를 가진 슬기로운 사람, 바르고 꼿꼿하고 무한히 참고 끝까지 견디며 가련한 인간을 가련하지 않게 너그러이 빌어주는 사람이 되라!」

선생은 또 본지의 최장수 연재물인 ‘세상살이 토막말’을 주시고 가셨다. 97년 9월 3일(지령 354호)부터 ‘세상살이 토막말’을 싣기 시작한 본지는 선생께서 작고하시기 전에 237편을, 올해 지난 3월 5일(지령678호)까지 나머지 103편 합쳐 모두 340편을 실었다. 장장 6년 6개월에 걸친 작업이었으며 그중 1년 10개월은 유작을 실었던 셈이다.

선생의 토막말은 미련한 인간을 가르치는 지혜의 샘이었다. 탈무드와 닮았고 채근담을 닮기도 했던 선생의 토막말을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된 사실이 창간 14주년과 선생의 2주기를 함께 맞이하는 때가 되니 뭐라 말할 수 없이 안타깝기만 하다. 

선생의 1주기였던 지난해에는 경남문인협회와 남해문학회가 앞장서서 선생의 문학비를 남해스포츠파크 광장에 세웠었다. 고맙게도 남해군은 선생의 문학비 건립에 필요한 예산을 지원해주었다. 선생의 문학비 제막식에는 선생을 잊지 못하는 많은 문학인들뿐만 아니라 주요기관단체장들도 함께 했었다.

문학비 제막식이 열린 그 날 오후에는 경남문학의 요람인 경남문학관에서 추모행사도 열렸다. 선생의 삶에 대한 회고담도 들었고, 작품세계를 되돌아보는 강연회도 있었고, 선생의 작품으로 꾸민 작은 연극도 있었고, 선생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애장했던 소장품들도 특별히 전시되었다.

그러나 2주기인 올해는 아직 추모행사가 준비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지 않는다. 생전에 선생을 흠모하고 따랐던 많은 사람들은 선생의 기일을 맞이하면서 다시 한번 숙연해 질 것이다. 그 숙연한 마음자리에는 추모행사조차 마련하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을 것이다. 또한 2년이 지나도록 선생의 유지를 받들지 못하고 있다는 자책감 같은 것도 들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선생의 유지를 받드는 실천을 한다면 그것은 젊은 문학예술인들이 향토에 뿌리를 내리고 창작활동을 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는 일이다. 선생이 했던 것처럼 세상 사람들의 마음의 밭을 가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마음의 밭을 가는 일은 경제의 밭을 가는 일에 못지 않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남해에는 선생과 같이 소중한 문화적 자산을 남기겠다는 뜻을 가진 사람들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터전이 아직 없다.

이 일은 결국 생전에 선생을 흠모하고 따랐던, 다시 말하면 선생이 일군 삶과 문학, 그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먼저 시작할 일이다. 거기에 가장 무거운 책임이 있는 남해신문조차 하루하루 신문제작에만 쫓기는 판이니 죄스럽기만 하다. 오늘은 저 하늘에서 선생이 내려다보고 계시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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