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햇살이 포근히 내려앉은 한나절, 은안들에서 큰내를 건너고 참나무지들판(옛날 홍수 때 참나무가 떠 내려와 땅 속에 묻혀서 덤벙을 파면 썩지 않고 나오는 들판)지나서 두 번 세 번 쉬어가면서 지게로 져다 놓은 볏단을 탈곡하는 작업은 머슴과 형님들의 몫이다.

와롱 와롱하며 높은 음을 토해내며 탈곡기가 힘겹게 돌아간다. 재미있어보여서 한번 밟아보겠다고 보채고 보채다 겨우 승낙을 받고 가운데 끼어서 발판을 밟아보지만 채 여물지 않은 다리 힘에 얼마를 못 버티고 이내 나가떨어진다.

형님들은 탈곡된 짚단을 연신 뒤로 토해낸다. 때론 장난기 섞인 그 짚단에 한 번씩 머리통을 얻어맞아가면서 짚단을 나르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다.

새끼줄을 쭉 펴서 놓고 그 위에 짚단을 30~40단씩 가지런히 포개고는 새끼줄 양쪽 끝을 꽉 잡고 어깨위로 들쳐 메고는 뒷마당으로 줄달음친다. 그러다보면 수북이 쌓여있고 짚단도 어느새 바닥을 드러내고 날라다 놓은 짚단 위에 퍼질러 누워서 하늘도 보고 대밭도 보고 잠시 편안한 휴식을 취한다.

뒷마당과 대밭어금에 할아버지께서 심으셨다는 유자나무 한 그루가 있다. 가끔은 동무들끼리 누구네 유자나무가 크다니 작다니 하곤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지금이야 재배법이 발달하여 접목하면 금방 수확할 수 있다만 그 당시는 씨를 심어놓고 그냥 내버려두고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다. 거름 한 동이라도 논밭으로 가야지 한데로는 생각도 못할 때였다. 어릴 때 심으면 환갑이 지나야 딸 수 있다는 속설까지 있었으니 참 귀한 나무다. 온동네 통틀어 너 댓 그루 있을까 말까.

약간 응달인데다 댓그늘에 바람막이까지 돼서 녹색의 열매가 황금색으로 황이 들어가는 모습은 정말 아름답다. 녹색은 옅어지고 황색은 짙어지지만 마치 노란색이 포르스름하게 물들어가는 양, 어느 화가가 이런 고운 빛깔을 연출해 낼 수 있을까!

소녀를 짝사랑하는 사춘기 소년의 설레는 마음을 살짝 들여다보는 것 같다.

짚단 위에서 놀다보니 싫증도 나고 배도 출출해지고 노랗게 물들어가는 유자나무로 고개가 돌아간다. 경사진 대밭에서 손만 뻗으면 잡히는 초래기 유자를 비비 돌려 틀어서 꼭지가 빠지게 딴다.

날카로운 가시에 찔리기도 하면서 딴 유자를 짚단 속에 넣고 발로 지근 밟는다.

그러면 신물이 조금 빠지고 몰래 먹는 기분에 취한다. 신물이 빠졌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시다. 그 시디신 맛에 진저리를 치면서 씨만 뱉어내고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유자를 따먹는다는 것은 상당히 큰 모험이다. 그 뒤에는 아버지의 야단이 기다리고 있다. 아무리 시치미를 떼어도 소용없는 일. 진하디 진한 유자향까지는 도저히 감출 수 없다. 대학나무라 불리던 귀하디 귀한 그 유자를….

오늘 처가로부터 택배가 도착했다. 아흔을 넘긴 장모님께서 다른 딸들은 부산·진주 등 근처에 사는데 멀리 떨어져 있다는 핑계로 일 년에 몇 번 찾아뵙지도 못하는데 환갑을 넘긴 딸이 눈에 밟히는지 당신의 무릎 불편함은 정녕 잊으시고….

나는 오늘 유자 택배를 앞에 두고 아득한 추억의 시간여행을 하고 왔다. 참 행복한 시간여행을….

2010년 11월 어느 날, 삼동면 둔촌향우

<이 글은 경기 안양시에 살고 계신 삼동면 둔촌 향우 조명래 님께서 보내주신 ‘고향으로 보내는 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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