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래는 바닷가 사람들만이 누렸던 눈물의 풍요다. 지천으로 널 부러진 개펄의 천연자원은 물때만 맞추면 언제든지 바구니가득 해산물을 제공해 주었다. 그래서 찢어지게 가난하였지만 부지런한 어머님을 가진 이는 언제든 싱싱한 자양분을 공급받았고 맛과 영양으로 건강하게 자랄 수 있었다.
늦가을 오후 억새가 서걱거리는 바래길을 걷는다. 담쟁이덩굴로 화장한 돌담 너머 고향집 마당에는 서대, 낭태, 가자미, 물메기가 쪽빛 바다를 털어 내리며 말라가고 있다. 탁 트인 태평양으로부터 불어오는 신선한 해풍은 해안 절벽사이로 농익은 가을 햇살을 부딪쳐 포말이 되어 하얗게 부서진다.
다랭이 논길 사이로 굽이굽이 능선을 기어오르는 지게길엔 지난여름 은빛멸치 떼 몰아 자망가득 털어 내리던 아버지의 굵은 땀방울이 축축하게 배여 있다. 남해사람만큼이나 질긴 생명의 촉을 틔어 올리는 마늘 밭 사이로 일렁이는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부지런한 삶의 속삭임이 남해유자처럼 노랗게 익어간다.
동편 말발굽길에선 일몰을 머리에 인 죽방렴에 갇힌 가을감생이 도도한 전설이 용트림하는 소리가 들리고 섬 속의 섬 고사리밭길엔 초록고사리가 치맛자락을 드리우며 산허리를 감싸고 있다. 발밑엔 당당하면서도 한편으론 처연하게 해안선을 감돌아 휘몰아치는 풍광들이 아우성친다.
뭍으로 향한 섬의 그리움은 늘 물밑 진지리길 일렁거림만큼이나 뒤숭숭하게 얽히고 설켜 내 새끼만은 부산으로 서울로 보내고 싶은 어미 애비의 간절한 소망이 물길을 가른다. 가도 가도 아름다운 길, 남해바래길 눈(眼) 시린 절경을 말로 지어 표현한다는 것은 애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바래길을 걸으며 이 축복의 땅에 내가 태어나고 살아가고 있음에 한없는 감사를 느낀다.
생각 있는 남해를 사랑하는 몇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다도해의 일 점 선도(仙島) 남해의 절경을 알려 제주의 올레길 못지않은 관광명소로 만들고자 혼신을 다하고 있는 모습을 볼 때 같이 하지 못함에 대한 미안함과 그들의 열정에 대한 부끄러움이 자리한다. 다만 오늘 내가 바래길을 걸으며 내내 마음 한 구석에서 지울 수 없는 서글픔이란 이미 죽어 저 세상에 계신 어머님의 얼굴이 시작부터 끝까지 내 가는 걸음걸음 발자국을 따라 같이 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지금도 생생하다. 비바람이 몰아쳐도, 눈보라가 휘날려도 어김없이 물때를 기다려 어린 동생을 맡기며 개펄로 바래를 나서던 어머니의 구부정한 등허리엔 볏짚으로 엮은 ‘떼바리’와 ‘호미’ 그리고 ‘대바구니’가 언제나처럼 야무지게 자리했다. 여덟 식구를 먹여 살리는 어머니의 모든 것이었다.
열 살도 안 된 나는 띠를 두르고 두 살 박이 동생을 등에 업고 바래길을 나서는 어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구부러진 바래길 사이로 어머니가 사라지면 텅 빈 집에서 바래의 풍성함만 상상하며 대바구니를 기다리기 일쑤였다. 해가 어둑해지고 밀물이 지면 뻘로 뒤덮여 얼굴도 분간이 안 되는 어머니는 겨울 갯바람에 퍼렇게 언 몸으로 대바구니가득 바래한 해산물을 머리에 이고 돌아 오셨다.
왜 그 때는 어머니는 보이지 않고 바래한 수확물에만 눈길이 갔었던지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죄스러움에 감당하기 어려워진다. 어머니는 항상 그렇게 해야 하는 사람인 줄로 만 알았다. 그 날 밥상의 맛있고 따뜻한 온기를 책임져야함은 당연히 어머니의 몫이라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나이가 들고 어머니의 바래가 새벽 장으로 이어져 돈으로 바꾼 그 덕에 바다를 건너 유학을 했고 대학을 마칠 때 까지도 어머니의 바래는 끝나지 않았다. 그랬다. 남해바래길은 억세디 억센 남해의 어머니들이 만든 눈물의 고난 길이었다. 그 길 위에서 사람이 자랐고 남해가 풍성해 졌다. 고단한 삶의 흔적은 오늘 내가 걷는 바래길에는 보이지 않으나 내 마음속 깊은 기억의 바다에는 또렷한 표상이 되어 떠다니고 있다.
이처럼 남해바래길 속엔 수많은 고난과 애환들, 남해의 어머니들이 키워낸 훌륭한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생생히 자리하고 있다. 우리의 역사이자 우리시대의 어머니를 추억할 수 있는 다큐의 장이다. 남해바래길이 단순히 아름다운 길로 비추어지기 보다는 우리를 위해 보내준 헌신에 대한 어머니의 삶을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는 의미가 담길 수 있도록  다시 조명 해 보아야 한다. 그래서 휴머니티가 살아있는 바래길이 조성되어 남해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감동까지 선사할 수 있는 명소로 우뚝 설 수 있도록 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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