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예가 김영태 씨가 12세기 도자기를 재현하며 작업에 몰두해 있다. 사진 아래는 아내 이은주 씨와 이도다완 관련 책을 펼쳐 보고 있는 장면.
“고려 문장가 이규보 시에 나온 화계(花溪)는 남해 화계(花溪)일 가능성…….” “서면 정포리를 청이도다완 가마터로 주목해 볼 필요…….”

도예가 김영태 씨가 최근 쏟아낸 남해와 관련해 의미 있는 발언이다.

도예가 김영태 씨는 이도다완을 재현한 사기장으로, 또 각종 유명 찻사발 전시회, 도예 입문 30년 전시회, 남해를 비롯한 사천 진주 산청 등 서부경남권 옛 가마터에 대한 지표조사와 관련한 보고서 작성, 사료와 물증을 통한 구체적 이도다완 가마터에 대한 논고 등, 그는 향토 역사학자로도 불린다. 특히 그의 서부경남 이도다완 도자기 역사에 대한 수회에 걸친 심도 있는 글들은 남해와 연관 지어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아직도 그는 가마터에 대한 연구조사와 문화제 재현 등에 대해 심도 있는 도자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사천시 곤명면 성방리에서 곤명요를 운영하는 그는 아내 이은주 씨(한국화가)와의 사이에 2녀를 두고 있고 현재 성방리 이장으로도 활동 중이다.

고려 중기 대문장가 이규보의 시 ‘화계에서 차 따던 일을 논하네’란 시를 하동 화개(花開)임을 처음으로 의심한 이가 그다.

“올 5월7일 6회째 진주찻사발전을 진주 경남문화예술회관에서 열었다. 이 행사 중 ‘고려시대 백운거사 이규보 헌다제례’를 올렸고 이때 화계란 지명이 하동이 아닐 수 있음 2007년에 이어 또다시 팸플릿에 썼다.”
팸플릿에 ‘현재 하동군 화개면이 차시배지로 알려져 있어 화계(花溪)와 화개(花開)를 같은 지명으로 보고 화계를 대부분 하동군 화개면으로 기록한다’는 문장을 넣어, 오류 가능성을  밝혔던 것이다.

진주찻사발전은 김영태 씨와 도자기로 인연을 맺어 도예가들이 2006년 4월 창립한 단체로 ‘진주 인근의 흙으로 진주인근에서 생산된 옛 찻사발(이도다완 등)을 작품화해 전시회와 헌다제 등을 여는 행사다.

“화계(花溪)와 화개(花開)로 쓰는 서부경남(옛 진주목) 지명은 모두 5곳이다. 화계(花溪)는 남해와 산청에 있고 화개(花開)는 하동, 사천 선진리 선진성을 옛날에는 선소라 하다가 한때는 화개라고 했다. 진주시 정촌면 화개리를 화동 또는 꽃골이라 불렀지만 하동 화개와 남해 화계만이 차와 관련 된 곳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 등을 찾았고 특히 그는 경남교육연구소가 1968년 5월15일 엮어 펴낸 ‘경상남도땅이름’이란 책에 이같은 사실들을 주목했다.

“이 책은 68년 1000여명의 당시 선생님들이 직접 현지인을 만나 경남전역의 지명을 확인하고 쓴 책이다. 지명지 등에서는 하동 화개에 차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이 책에선 하동 화개에서 차와 관련된 내용이 없어 상당히 의아스러웠다. 하지만 남해에서는 다정, 다천 등지에 차와 관련한 내용이 나온다. 68년 전후로 하동 화개에는 차에 대해 주민들의 인지가 안 되다 가능성을 생각해 봤다. 이규보의 화계(花溪)가 하동 화개(花開)인지 진짜 맞는지 검증해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책에는 남해에 대한 기록은 정말 잘했다.”

그는 또 “퇴계 이황이 사천의 한 섬인 작도에 쉬어갔고 이곳에 그를 기리는 작도정사를 건립했다. 이처럼 서울에서 지인이 오면 전망 좋거나 쉴만한 곳으로 데려간 것 같다. 이규보가 친구 손득지와 함께 진주에서 놀러간 곳이 색다르고 풍광이 좋은 남해일 가능성 있다. 이때 남해 화계를 찾은 이규보가 백성의 안타까움을 보고 시를 썼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는 것이다.”

김영태 씨는 이와함께 “고려시대의 차와 관련한 남해의 위상을 주목해 봐야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하동은 각종 기록에 의해 차의 본고장임은 틀림없다. 화계(花溪)가 남해 화계가 맞는다면 이규보가 살았던 고려 때의 차문화는 남해에서 개경으로 진상된 고급 차가 났던 지역이었을 것이고 이런 것이 고려 차문화의 정수였을 것이다.”

이도다완에 대해서도 그는 할 말이 많았다.

“남해는 왜와 많이 접해 있던 지역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왜구가 고려 말과 조선 초까지 46년을 왜구의 소굴이 돼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도다완은 임진왜란 이전에 일본으로 건너간 사발인데 충분히 이른 시기에, 이곳에서 생산된 다완이 일본으로 건너갔을 수도 있다. 남해에는 어쩌면 이도다완 가마터가 온전히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 아인 박종한 선생님이 파편을 발견하고 청이도다완의 생산지로 꼽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 일 것이다. 만약 박종환 선생의 말처럼 남해에서 이도다완 가마터가 발견된다면 이걸로 새로운 남해 문화자원으로 활용하거나 관광지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서부경남 구석구석을 훑듯 도자기와 관련된 지명과 역사, 사료 현장답사와 자료로 인한 근거를 대며 차와 이도다완에 애착과 아쉬움, 아픔 등에 차분히 말했다. 역사와 자료에 의한 소설적 비약에 대해 경계했고 입증과 근거를 말하려 애를 쓰는 것 같았다.

남해와의 인연에 대해서는 “특별한 인연은 없지만 남해가 좋아 자주 찾곤 한다”고 했다.

32년을 도예가로 활동했고 2008년 도예 30주년 기념전, 이은주/김영태 부부전, 서울 부산 진주 등지에서 개인전과 단체전 등을 연 최고 도예가로 통한다. 작업실과 거실 등에는 조선시대 도자기 파편과 그가 쓴 글, 수집한 자료 등이 빽빽했다.

저작권자 © 남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