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위는 호구산 염불사 아래에 있는 녹차밭이고 자생 차나무다. 사진 아래 왼쪽은 염불사 차나무 중 뿌리둘레가 볼펜보다 수십배 두껍고 10cm이상 될 것 같은 차나무다. 뿌리옆 하얀 것이 볼펜이다. 20년 전 이 차나무를 처음 발견한 유만엽 할머니(79)는 “두 차례에 걸쳐 밑동까지 잘라버렸지만 아주 오래전부터 자생한 차나무”라고 말했다. 오른쪽 아래는 용문사 차나무로 일부는 자생한 것이다.

 

차를 말할 때 ‘화계(花溪)에서 차 따던 때를 논하네……산과 들 차나무를 불살라 공납을 금지하면……’이란 시가 자주 인용된다.

동국이상국집 등을 쓴 고려시대 대문장가 이규보의 시(詩)다. 이 시 중 ‘花溪(화계)’라는 표현에서 이 화계가 일반적으로 인근 하동군 화개(花開)를 뜻하는 지명으로 알려져 왔다.

이에 대한 이의를 제기한다면 문제가 될까. 혹, 이 시에 나온 지명이 남해군 이동면 ‘화계마을’일 가능성은 없을까. 차(茶)와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있는 ‘화개’나 ‘화계’란 지명은 경남에선 하동군 화개, 남해군 화계, 산청군 화계 등이다.

많은 차시(茶詩)가 있지만 백성에 대한 깊은 애정을 표현한 이 시는 이규보의 차와 차시의 백미로 일컬어진다. 차 문화를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이야기 되는 시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 시는 ‘관의 독려로 화계(花溪)에서 차 따는 일이 백성의 고혈과 살점이니, 차라리 차나무를 불 질러 버려라’는 내용이 주다.

남해에서 이 시의 중요성은 지명을 일컫는 ‘화계(花溪)’란 지명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이 시에 나온 화계(花溪)란 지명은 차의 최고 명산지이자 한반도 차 역사가 시작된 하동군 화개면(花開面)을 일컫는 지명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 근거로 조선 세종실록지리지 등에 ‘하동현 토산(土産)은 작설차(雀舌茶)’란 표현이 나오거나 삼국사기에 ‘흥덕왕 3년(828년) 당나라 사신으로 갔던 대렴이 차 종자를 가지고 오자 왕이 지리산에 심게 했다......’는 기록을 등을 이유로 하동 화개가 차 생산지로 가장 유명해 거부감 없이 사용돼 왔다.

조선, 초의선사가 ‘동다송(東茶頌’에서 ‘지리산 화개동에 차나무가 사오십리에 걸쳐 번성하는데 우리나 차밭 중에서 이 보다 더 넓은 곳은 없다…….(제23송)’ 등 시도 화개(花開)=화계(花溪)의 방증된 결과물이었을 것이다.

또 시 내용 중 ‘포령천리현수수(抱嶺千里眩手收 험한 산비탈 간신히 따 모아)’와 같이 ‘험한 산비탈’이 지리산 화개골과 같은 깊은 산중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것 등이 이를 방증하는 것으로 이해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지만 이는 지명에 대한 의문을 달지 않고 차용해 쓴 혐의가 너무나 짙다.

결정적으로 시에 나온 정확한 지명의 표기는 ‘花溪(화계)’란 점이다.
화계(花溪)라고 표현된 이규보의 시는 ‘운봉에 사는 노규선사가 조아차를 얻어 보이고, (스스로)유차(孺茶)라 이름 붙이고서 시를 청하기에 지어주다’는 설명을 단, 5편의 연작 시 중 한 편이다.

이 시를 쓴 배경은 친구 손득지가 진주에 부기(장부)임무를 맡아보던 때 화계에 놀러가서 본 장면을 기억해 시 쓰며 화계(花溪)란 지명을 사용하게 됐다.

하동군 화개는 신라 성덕왕 때부터 ‘화개(花開)’ 즉 ‘꽃 피는 곳’으로 불려왔다.
하동 화개의 ‘개(開)’는 ‘열리다’란 뜻의 ‘열 개’자이고, 시에서 말하는 ‘계(溪)’는 시냇물을 뜻하는 ‘시내 계’자다.

첫 번째 의문 하나는 이규보와 같이 고려시대 전체를 아울러 최고의 대문호로 칭송받는 그가 지명을 잘 못 썼을까하는 점이다. 그것도 상대방이 있는 화답시로 쓴 글에서 한글도 아닌 한자로 쓰고 글자 획수와 모양이 완전히 다른 지명을 실수로 썼다고 보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아 ‘花開=花溪’는 등식이 성립할 수 없는 말임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경남에선 하동군 화개, 남해군 화계, 산청군 화계가 있지만 모두 비슷한 음으로 들리지만 발음이 틀린 것에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경상도식 발음에서 ‘개’와 ‘계’는 비슷하지만 경기도 출신인 이규보의 발음은 분명 ‘개’와 ‘계’를 구분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하동 화개를 표현한 초의선사는 그의 동다송에서 화개를 ‘화계(花溪)’가 아닌 ‘화개(花開)’로 썼다는 것은 원래 화개는 화계가 아니었다는 말이기도 할 것이다. 또 하나는 하동 화개를 선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차용했을 가능성이다.

이규보가 실수를 하지 않았다면 당시 진주에 속한 화계는 산청과 남해 둘 뿐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함양군에 조선시대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재임당시 야생차를 찾았다는 기록이 있고, 산청은 세종실록지리지에 차와 관련된 야생차가 있었던 지역이지만 남해는 없다.

이유는 실제 없었을 수도 있고 세종실록지리지나 동국여지승람 등에는 그 기록의 한계 때문에 지역 특산물이 빠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산청군 화계(花溪)마을의 경우 야생차가 나는 지리산 권과 직선거리로 20km정도 떨어졌다는 점, 마을 이장 등은 “들은 적이 없다. 모르겠다”는 등의 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은 차와 관련된 인식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남해군 화계(花溪)의 경우는 어떨까. 화계의 인근에 차가 있었다는 다정, 다천마을과 가장 가깝고 오래된 암자이자 자생차가 확인된 용문사와 용문사에 딸린 염불암은 화개마을과는 불과 2km의 거리에 있는 사찰이고 보면, 신라 원효와 함께 1300년 전 차문화가 있었다고 의심해 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다정마을 뒤를 따라 호구산을 넘으면 가장 가까운 곳에 염불사가 있고 호구산을 경계로 화계와 다정마을 중간쯤에 용문사가 있음은 무엇을 뜻할까.

이규보가 맞다면 그의 시에 나오는 지명 ‘화계’는 남해 화계일 가능성이 높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800년 전, 이규보는 관원인 친구 손득지가 있는 진주로 놀러와 남해를 찾아 화계를 둘러본다. 관의 독려로 어린이 노약자 할 것 없이 화개와 용문사 등지의 산과 들에서 차를 따고 있는 남해의 백성을 바라본다. 유람 온 그가 죽을둥말둥 찻잎을 따는 남녘의 백성을 보고 스스로 괴로워하며 ‘차나무를 불 질러 버렸음’하는 생각을 했을 것이고 기회가 되매 이를 시로 풀어냈을 것임을 짐작해 봄이다.

이동면 화계지역에는 어쩌면 찾지 못한 차나무가 자생할지도 모르고 2008년 ‘최고의 유전형질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엿보이는 금산 보리암 인근의 차나무도 그 백성들의 눈물이 남은 자국일지도 모를 일이다.

(이에 대한 건전한 논의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고 이규보의 시에 나온 ‘화계가 하동 화개가 아닐 수 있다’는 제보는 사천시 곤명면에서 곤명요를 운영하는 도예가이자 향토사학자인 김영태 씨가 했음을 밝혀둔다.)

이규보의 차시

                    :
화계에서 찻잎따던 일 논하매(因論花溪採茶時 인논화계채다시)
아이 노인 가리지 않고 관에서 징발하더라(官督家丁無老稚 관독가정무노치)
험한 산비탈 간신히 따 모아(?嶺千重眩手收 장영천중현수수)
머나먼 서울까지 등짐 져 날랐도다(玉京萬里?肩致 옥경만리정견치)
백성의 애끓는 고혈이니(此是蒼生膏與肉 차시창생고여육)
이들의 피땀으로 이룬 것이다(?割萬人方得至 연할만인방득지)

                    :
그대 다른 날 간원(諫院)에 들어가면(知君異日到諫垣 지군이일도간원)
내 시의 은밀한 뜻 부디 기억하시라(記我詩中微有旨 기아시중미유지)
산과 들의 차나무 불살라 차 공납 막는다면(焚山燎野禁稅茶 분산료야금세다)
남녘 백성들 편안함이 이로부터 시작이라(唱作南民息肩始 창작남민식견시)

저작권자 © 남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