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은 배추, 무, 등등의 온갖 씨앗을 팝니다. 당귀 인삼 대추 등 약재도 팝니다. 씨앗은 생명이겠고 약재는 생명력 아니겠습니까.
씨앗은 500원치도 팔고 1000원치도 팔고 “손님이 달라는대로 준다”고 했습니다.
“하도 없이 살았기 때문에 필요없는 것을 뭉텅이 씩 팔 순 없다”고 합니다. 썩혀 버릴 양을 파는 것은 양심을 속이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3세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답니다. 밥을 먹기도 어려웠던 집안 형편, 13세에 남의 집 ‘고용살이’를 갔다고 했습니다. 한 집에서 3년, 또 한 집에서 3년, 또 3년, 3명의 집주인을 거친 그 세월이 9년이었답니다. 그 어린 나이에 “숟가락 하나라도 덜어줘야한다”고 생각했답니다.
9년을 그리 살면서 ‘이렇게 살아선 안되겠다’고 생각했다네요. 22세 때였지요. 목선을 만드는 도목수의 아래에서 또 3년을 배웠답니다. 3년 일을 배우니 “연장 한 다불을 장만해 줬다”고 했습니다. 27세에 결혼을 하고 같은 해 징집됐습니다. 휴가를 나오면 배 목수일을 하거나 나무를 해 팔아 기어이 아내에게 돈을 전하고 복귀를 했답니다.
고향인 남해 서면 유포마을에서 과수원을 하다 광양에 비료공장이 생기면서 공해로 과수원을 망쳐버렸답니다. 남해시장에서 염소나 고양이를 파는 가축 장사도 했답니다.
2남2녀를 뒀는데 먹고 살 일이 막막한 시절이었을 겁니다.
“친구가 마련해 준 돈사가 있어” 7년간 돼지 사육을 했답니다. 얼마나 일에 몰두 했는지 그 세월이 지독했답니다. 아내와는 생이별이었고 아이 교육 때문에 더는 못할 것 같았답니다.
칠순이 되었습니다. ‘잘 키워줘 고맙다’며 자녀들이 500만원을 줬다고 했습니다. 해외여행 가시라고요. 돈을 받았지만 “쓸 수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노인은 ‘잘 키워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다 북받쳐 울었고 ‘돈을 쓸 수가 없었다’고 말할 때도 울었습니다.
“너무 너무 고생해서 살아왔기 때문에 절대로 1원이라도, 남의 것을 원하지 않고 내 자식들도 그렇게 하길 바란다”고 말할 때, 노인은 또 울었습니다.
노인은 이 돈을 “나를 도와준 남해군민을 위해서”라며 남해 10개 마을에 50만원씩 500만원 전액을 기부합니다. ‘노인들 관광 가실 때 쓰시라’고 했답니다.
소원이 있답니다. “80이 되면 그땐 50만원이 아니라 꼭 100만원을 사회에 ‘희사’하겠다는 생각을 속으로 가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노인은 남해시장에서 ‘씨앗’을 팝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