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천벽력을 맞은 느낌이고 가슴이 텅 비는 심정이다. 그러나 이미 예상되었던 일이 아니었던가? 외국에서 지인들이 들어오고 동교동계 사람들이 병원에 모여들고 영원한 비서실장인 박지원 의원은 매일 출근하다시피 한다는 보도도 있었으니 짐작이 될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예기치 못한 일이 갑자기 일어난듯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기적을 바란 심정이었을까? 그랬다!

 그동안 5번이나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숱한 고난을 당하면서도 역경을 딛고 꿋꿋이 다시 살아나 노벨 평화상마저 수상한 기적 같은 삶을 살아 온 경력이 있기에, 또한 할 일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는 아쉬움에 그냥 보내 드릴 수가 없다는 미련 때문에, 또 한 번의 기적을 바라는 마음이 있었던 모양이다.

 김 전 대통령의 업적의 크기와 깊이는 범부로서 감히 헤아릴 수가 없고, 앞으로도 두고두고 학자들에 의해 연구 발표되고, 숱한 이들의 인구에 회자 될 것이니 이 자리에서 여러 가지를 덧붙일 필요는 없겠다. 다만 선생이 몸소 실천한 ‘용서와 화해’에 대해 한 마디하고 함께 할 것을 제안하고 싶다.
  선생만큼 긴 세월을 걸쳐 그렇게 갖은 고통을 당한 사람이 없을 것이. 평생을 ‘빨갱이’로 매도되었고, ‘이제 병들고 늙어서 앞에 나서 일을 할 수도 없다.’라고얼마 전에 한탄했는데도, 이름 있다는 논객들, 정치인들이 새파랗게 날을 세우고, 이빨을 들이 내면서 달라 들었다. 그러나 한 번 돌이켜 생각해 보라!
 김 전 대통령은 ‘정치 보복은 없다!’하는 정치 철학을 실제로 행했다. 선생의 대통령 재임
시 억울한 정치 보복을 당한 사람이 있는가? 이것이 쉬운 일인가? 할 수 있는데 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말이다!  

 지금부터라도 이 위대한 정치인이 남긴 유산을 살려야 한다. 정치 보복은 끝내야 한다.
그리고 ‘용서와 화해’가 당장부터 실천되어야 한다. 화해가 있으려면 먼저 용서를 구하는 것이 순서이다. 당장 이미 고인이 된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몹쓸 짓을 한 사람들이 용서를 구하는 것이 순서라는 것이다. 그리고 함께 화해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당장 시골 촌부인 필자부터 고인께 용서를 빌겠다.
 거목에게는 숱한 잔가지가 있는 법이고, 이런 저런 사연과 인연이 얽혀 있게 마련이다.  나에게도 선생에 얽힌 지푸라기 같은 사연이 있다. 그런데 그 사연은 참으로 부끄럽기 짝이 없는 것이다. 그 일이 있은 후 지금까지 마음속으로 언젠가 용서를 빌어야 하겠다고 생각만 했고 지금까지 하지 못하고 말았다. 결국은 짙은 회한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김대중 전 대통령님,
 1991년 가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다음 해 대선을 앞두고 민주당 후보였던 선생이 경남을 방문하였는데 숙박지가 마산이었습니다. 당시 재야 운동권의 지도자들은 선생의 방문을 놓고 만날 것인가 말 것 인가에 대해 설왕설래하다가 만나자는 쪽으로 결정이 나서 만나러 갔던 적이 있습니다. 숙소인 R호텔로 들어가 안내를 받아 들어가니 복도에 그야말로 줄지어 사람들이 서 있었습니다. 선생을 한 번이라도 만나서 손이라도 잡아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지나쳐 가는 우리들에게 고개를 돌려 자신들의 얼굴을 애써 감추려 하는 기색 역시 역력했습니다. 노출되는 데에 대한 두려움과 만나고 싶다는 간절함이 오버 랩 된 민중의 모습이 저런 모습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잠시 하기도 했습니다.

 약속이 잡혀 있었던 우리는 바로 방으로 안내를 받았는데, 2줄로 나란히 의자가 배열되어 있었고 그 자리에 앉아 후보와 대담을 시작했습니다. 무엇인가 내가 질문을 했고, 피로감이 짙어 보이던 선생님이 다소 퉁명스럽게 답을 한 모양이고, 나는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렸습니다.
그러자 좌장 격이었던 김 영식 신부도 따라 나와 버리고 그래서 그 자리는 파토가 나 버렸습니다. 저의 나이 40이 채 안된 당시엔, 재야 대중 운동을 한답시고 제도 정치권에 대한 불신감과 도덕적 우월감에 잔뜩 젖어 막연하게 정치인들에 대한 경멸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 제도권의 보스 격인 김대중 후보가 우리를 지도 하려고 한다는 선입감으로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린 것입니다.

 제가 부린 심통은 참으로 건방지기 짝이 없는 소행이었습니다. 고통을 격은 정도를 따져서는 감히 발끝에도 따라 갈 수 없고, 경륜을 말하자면 같이 논할 수도 없는 일천한 처지의 젊은 사내의 행패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 무례함을 범하곤 곧바로 후회를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습니다. 이런 고약한 행위에 대해 굳이 변명을 하자면 순수한 대중 운동을 추구한 나머지 지독한 아집에 빠져 있었던 상태였다고 말 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저 부끄럽기만 합니다.

 이런 유의 모욕과 행패는 선생께서 생전에 숱하게 당한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 많은 가해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 고인께 진심으로 용서를 구합니다.

 “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그날 자리를 박차고 나오는 순간에도 선생님을 존경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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