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현태 군수와 이호균 남해문화원장이 문형이 새겨진 암각을 짚으며 의견을 나누고 있다.
지난 12일, 정현태 군수 및 한려해상국립공원, 남해문화원, 역사연구회, 남해군서복회 관계자들은 상주면 양아리 서불과차 현지 답사를 진행했다.

이날 서불과차 현지 답사는 이전부터 논의돼 왔던 명칭 조율과 암각에 새겨진 문형에 대한 의견을 나누는 자리로 이뤄졌다.

‘서불과차’를 두고 이전부터 남해지역 외 다른 지역에서도 답사를 올 만큼 학술연구로서의 가치는 심히 논의되고 있는 바, 이날 이뤄진 ‘서불과차’를 둘러싼 논란들은 지난 행적과 미뤄 예기치 못한 일이 아니었다.

서불과차(徐市過此)市앞치마‧불-4획, 서시과차(徐市過此)市저작‧시-5획, 서불기배일출, 서씨기병일출, 사냥하는 모습을 나타낸 그림이라는 주장 등 진위여부의 모호성으로 ‘남해 상주리 석각’은 논란이 지속됐다.

이 외에도 서불과 함께 다녀간 동남동녀의 인원 수 등 짚어 보아야할 학술적 검증이 필요한 부분 등이 재차 강조됐다.

본지는 지난 ‘서불과차’와 관련해 제주시 관광자원화 선점 및 일본 교육위원회 방문 등 여러 형태의 기사내용을 보도한 바 있다.

이에 따라 이번 현지답사를 계기로 ‘남해 상주리 석각’이 일본, 중국과 같은 국제적 명승지로 개발될 수 있을 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서불과차’와 관련해 남해군은 서울대 국제 서복학회 연구팀에 학술 용역을 의뢰해 “중국과 일본, 제주도 등에서 이뤄지고 있는 역사적 ‘진실게임’에 말려들지 말고 남해에 현존하는 유물을 이용해 동북아의 연결 고리를 찾으라”고 조언을 받았으나 사실상 지금까지 어떠한 발전도 꾀하지 못했다.

본지는 지난 2006년부터 ‘서불과차’를 둘러싼 논란을 두고 ‘서불과차’가 지닌 역사적 사료로써의 가치 모색 및 석각의 보존, 관광자원화 추진에 대한 필요성을 강조하며 지역 내 관광자원 개발의 단초는 마련했지만 제주도 ‘서복전시관’과 같은 기관 건립 및 외국 관광객 유이와 관련해 군은 남해를 ‘서불과차’와 관련한 구체적인 명승지로 개발할 수 있는 아이딩를 찾아내고 과노강자원화를 실행하는데 더욱 세심한 노력이 뒤따라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군은 남해를 ‘서불과차’와 관련한 구체적인 명승지로 개발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찾아내고 관광자원화를 실행하는데 더욱 세심한 노력이 뛰따라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군은 ‘남해 상주리 석각’과 관련해 벽련마을 입구 어귀 암각화 된 문형 외 새 , 거북 등 상형 문자와 비슷한 암각문 등의 알 수 없는 문자가 양아리 부근에 많이 산재하고 있는 것과 미뤄 지난 2006년 동북아 역사재단의 김일권 연구원이 종교학적 관점으로 연구된 결과 발표에서 “서불과차 암각문의 난해성을 역이용, 신비성을 부각시키는 관광 자원화 추진 방안”에 사실상 힘을 더 싣게 됐지만 차후 논란이 거세질 것으로 사료된다.

서불과차란?

1974년 2월 16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6호로 지정된 ‘남해 상주리 석각’은 서불제명각자(徐市題名刻字)라고도 하는 그림문자로 상주면 양아리에서 금산(錦山) 부소암에 오르는 산중턱 평평한 자연암에 새겨진 특이한 형태의 조각이다.

중국 시황제의 심복인 서불이 황제의 명으로 동남동녀 3천여명과 함께 삼신산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떠돌았던 행적을 암각화한 것으로 추정되는 ‘서불과차’는 자연석 위에 모호한 무늬로 음각돼 있다.

‘서불과차’를 에워싼 진위 내용으로는 시황제의 폭정에 염증을 느낀 서불이 불로초를 구실로 일행을 데리고 피난을 다니다 제주도를 거쳐 일본에 정착했다는 설과 남해 금산과 제주도 한라산에서 불로초를 구하지 못해 일본으로 도주했다는 설 등이 전해진다.

한편, 우리나라와 근접해 있는 일본에서는 서불이 일본에 정착해 중국의 선진 문물을 전했다는 전설로 신격화돼 있으며 중국 또한 자국의 인물이 동아시아의 개화에 일조 했다는 사실을 부각하며 역사적 우위를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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