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열기가 무척 뜨겁습니다. 뜨거운 정도가 날이 갈수록 더해지고, 습한 기운마저 덮쳐 심신을 지탱하기조차 힘듭니다. 이러한 기후가 몇 년 전부터 계속되어 불쾌지수가 앞을 가리고 찜통더위가 일상이 되어버린 여름을 생각하면 우리나라도 열대 국가로 변하고 말았다는 자괴감마저 듭니다. 열대의 기후와 더위를 쫓아야 하는 생활 방식에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가 어째서 이렇게 변해버렸는가 하는 아쉬움은 두고두고 회자할 것입니다.
자연의 정서를 끔찍이 사랑하는 우리로서는 이러한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당분간은 힘들 것입니다. 하지만, 어쩌면 이것은 자연과 문명 사이에서 자연은 원초적 생명이요, 문명은 창조적 공간이라는 의식을 어떻게 조화시켜 나갈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간과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일인지도 모릅니다.
원초적 생명이 인간성을 담보할 기회요, 개발은 창조성을 보장할 절호의 순간임에 틀림이 없으나, 사람은 이를 철저히 무시함으로써 자연과 문명을 대립과 투쟁의 사슬로 변모시켜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 엄청난 과오가 자연과 생명, 자연과 문명, 생명과 문명을 이원화시켜 이상기후를 잇게 한 것이라면, 이에 대한 해결책도 당연히 사람이 도출해 내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날로 뜨거워져 가는 지구를 살리기 위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며, 앞으로 더 변화될 기후 위기를 어떻게 다스려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토로하고 숙의의 과정을 거치면서 지혜를 공유해야 할 것입니다. 누구나 간직하고 있을 이러한 물음에 고심하며 마침 볼일도 있고 농촌과 도시와의 여름 정서의 차이를 느껴보리라는 생각에 도심으로 향합니다. 도시라 해서 다를 바 없이 사람들은 삼삼오오 더위를 달래려 분주한데, 거리를 지날 때마다 느끼는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거리가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거리가 이처럼 뜨거워진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건물은 물론이고 버스와 자동차 등에도 온종일 에어컨이 가동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에어컨 가스가 대기에 영향을 미친 측면이 있을 정도로 에어컨이 상용화되어 안부 인사로 에어컨이 있어 여름을 시원하게 보낸다는 말을 들을 정도이니 말입니다. 이런 인사법이 통용될 시기라 해도 에어컨으로 인해 지구가 더 뜨거워지고 그 뜨거움이 뭉쳐 태양 열기를 조율할 하늘의 작용이 무디어져, 그래서 거리가 더욱 뜨거워진 것이라면 가시적으로나마 이러한 현상을 되돌릴 묘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문명이 발달하면 자연은 상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에 익숙해지기 전에 대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는 다짐을 하며 목적지로 향하기 위해 지하철역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지하철 객차 출입문이 열리고 안으로 발을 디디는 순간, 시원한 바람이 더위에 지친 피부를 감싸줍니다.
대합실과 지하철 안의 시원함은 차원이 다를 정도로 느껴질 그 순간, 필자의 시선을 끈 한 생명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에어컨 바람을 피하며 요리조리 사람의 머리 위로 아슬아슬하게 날아다니는 나비 한 마리였습니다. 그 나비는 필자가 서 있는 지하철 객실 위를 빙빙 돌며 밖으로 나가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들어온 경로를 찾다 길을 잃어버린 채 방황하는 듯하였습니다. 사람들도 나비를 피하려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며 당황한 기색을 연출합니다. “저 나비가 어떻게 해서 지하철 안까지 오게 되었을까?” 나비가 지하철 구내까지 들어오기까지 더워진 날씨에 지하철 대합실에서 불어온 냉기를 쫓아 스며들었다가 대합실을 지나 승강장까지 오게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며 안타까워합니다.
자연 속에 있어야 할 미 생명이 문명의 한가운데 들어온 사건은 자연 생명마저 더위에 지친 탓이 될 수도 있고, 나비가 방향감각을 상실하였다면 이것은 정말 예사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긴 요즈음 이상기후로 인한 증세가 심각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후유증이 심화해 가는 현상을 심심찮게 목격하곤 합니다. 제초제를 치지 않는데도 풀이 말라 죽는다든지, 벌이 꽃에 날아오지 않는다거나, 작물 성장이 더뎌 수확이 제대로 되지 않는 등의 현상이 그렇습니다. 무언가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조짐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날까요. 만약 이러한 현상이 자연 발생적이기보다 그들 세계에 원치 않는 변화로 인해 일어나는 현상이라면 이를 객관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연 현상의 변화를 유추하면 분명한 것은 세상 만물이 생명을 영위하며 살아가는 데는 보존에 대한 물리 화학 작용 못지않게 생성의 순화된 질서도 몫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작용은 인위적인 것이 아닌 자연 발생적 순환이라는 초연한 작용이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질서 속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것의 방증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삶을 가능하게 할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곧 신뢰가 아니겠습니까? 자연과의 신뢰, 개체와 개체, 개체와 전체 사이에 형성되는 신뢰.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러한 불문율이 깨어짐에 따라 이전에는 듣도 보도 못한 현상들이 전개되고 있다면 그러한 신뢰 부재의 원인을 분석하고 대비하는 것이 상책이 아닐까요. 만약에 이런 의지가 서로 배치되어 대지가 뜨거워지고 이상기후로 부작용이 심화한 것이 결국 사람의 생각이나 감정이 연관된 신뢰 부재라면 이 당면한 문제 해결을 위해 어떤 형식으로든 객관적인 성찰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심(心)과 기(氣)는 에너지로서 주변 생태의 성장에 반영되는 입자는 긍정이면 긍정을 부정이면 부정의 사고를 형성케 하는데 이런 생체 감각을 생각하면 내가 불민하면 내 집 주위 생명 역시 불민해지는 감정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신뢰와 믿음이 동반된 생태 감각을 견지하면 생명 간의 생체 에너지는 건전한 생각이나 감정에 따라 적극적으로 반응하지만, 이 생각이나 감정이 제대로 정화되지 않을 경우, 뇌 신경계, 면역계에 지대하게 영향을 미쳐 생명 전체의 생태에도 영향을 미치게 한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를 비유하면 내가 먹는 감정이나 생각이 전체 생명의 온열을 조율할 에너지라면 이처럼 소중한 에너지를 적절히 다스릴 지혜를 품부하는 것이 사람이 할 수 있는 도리요, 대안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은 부분이 아니라 전체의 상존이요, 상생의 전체성을 띤 지구 생명 공동체라는 점에서 나비의 애절함이 가슴을 파고들기에 더욱 그러한 심증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생명이 부재한, 믿음이 상실되고 신뢰가 사라진 세상에 대해 나비의 방황이 만연하기 전에 말입니다. 나비가 무사히 지하철 역사를 빠져나와 창공을 날 수 있도록 지금 내 감정은 어떠한지, 만약 분노와 스트레스로 인한 부정적 열량이 치솟아 오른 상태라면 나비의 생존은 불가할 것이기에 얼른 순화한 감정으로 신뢰를 이을 수 있도록 내면을 살피면서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