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이 너무 많은, 지식이 충만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몰랐던 사실을 알았다는 것은 대단히 기쁜 일입니다. 하지만, 알고자 하는 노력에 비하여, 너무나 쉽게 알아버리는 탓에 오히려 안다는 것의 가치가 희석될 정도라면 이 안다는 것을 어떻게 인식해야 할까요.
이전에는 배우고 익혀 제대로 경험할 때라야 자신 있게 안다는 사실에 부합하였지만, 스마트폰이 보급된 이후엔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가볍게 터치만 하면 너무나 손쉽게 지식이나 정보를 섭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힘들게 공부하거나 노력하지 않아도 내가 모르는 것을 쉽게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이전에 비해 인내력과 근기가 부족한 현실이 때로는 안타깝기조차 합니다. 쉽게 취득한 지식은 몸과 마음에 체득되기도 전에 사라질 공산이 큽니다.
그러다 보니 안다는 것이 인격의 중심으로 우뚝 서기보다 자만심이 증폭되거나 욕심을 이끄는 방편이 되어 성장에 오히려 장애가 될 가능성마저 농후해집니다. 흔히 저 사람은 너무 많이 알아 탈이라는 말의 뉘앙스가 있듯이, 안다는 것으로 인해 몸이 꿈 트고 솔선수범의 진솔함보다 말이 앞서는 경우라면 실체적 진실을 담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안다는 것이 사회를 건전하게 이끌 방편이 되지 못한 채 표류하고 있다면 어떤 형태로든 이를 정화할 새로운 방식을 물색해야 하지 않을까요. 속칭 ‘남들보다 더 많이’라는 구호가 너무 많이 알아서 일어난 욕심의 일단이라면 말입니다.
그래서 생각해 봅니다. 아는 것은 어떻게 생성되어 나에게 오는가? 나는 아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 내 심성(心性)을 도모하고 있는가? 아는 것이 나에게 오기까지 수많은 인연이 함께함을 잊지 않고는 있는가? 아는 것이 나의 건전성과 진리로 자리매김하는 데 나는 얼마만큼 정성을 기울이고 있는가? 아는 것이 빌미가 되어 만약 부작용이 일어난다면 이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아는 것을 충족하는 순간, 사람의 결핍된 정서가 스며든다면 이를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
이렇듯 안다는 것을 유해하게 하는 영악한 지식욕에서 오는 욕망, 욕념, 욕심의 소이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느 시대이든 3욕을 다스리고 내면을 정화할 집중된 의식이 필요한데 우리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지식욕에 함몰되어 생명의식이 부족한 오늘 우리 모두에게 통용될 순리와 순수에 부합하는 지혜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필자는 이를 앎이라고 지칭해봅니다. 앎은 전체와 융화하는 결정체이자 부분과 전체를 아우르는 기연(其然)과 불연(不然), 내유와 외유의 경이로운 합일입니다. 또한, 앎은 지식이 완벽히 쌓여진 상태에서 오히려 지식을 초월하여 새로운 자각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는 낮춤과 비움의 길이기도 합니다.
요즈음 이러한 행보에 부합하며 살아가시는 분이 눈에 띄지는 않지만, 수십 년 전 이 낮춤과 비움의 철학을 겸비하여 살아가신 분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장일순 선생님입니다. 60~70년대에 원주에 거주하셨던 장일순 선생님은 ‘기어라, 한없이 낮추고 기어라, 낮추고 기면 길수록 더 높고 넓은 세계를 담을 수 있다’는 실행을 겸비한 어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현대사에 드물게 지식 위주의 삶이 아니라 낮춤의 미학을 실제 행동으로 보이신 분입니다. 우리 시대에 근접한 60~70년대 생존하셨던 선생의 낮춤과 비움의 철학은 앎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많은 분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 남해도 드러나지는 않지만, 앎과 생명의식으로 살아가시는 분들이 곳곳에 존재하시기에, 천혜로 호칭하는 보물섬 남해의 앎 역시 크게 빛나리라 확신합니다. 이를 반영하듯 필자가 사는 동네의 원로 어르신 한 분은 “농사도 자연의 이법대로 해야 한다, 욕심내지 않아야 한다. 욕심을 내면 낼수록 땅이 가만히 있겠느냐?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위해를 사람에게 가할 수 있다며 농사도 낮춤과 비움의 철학이 있어야 한다”라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농사를 제대로 할 줄 아는 것이라고 일갈합니다.
이를 우리 농촌의 현실에 빗대어 너무 많이 알기에 오히려 농사의 진면모를 놓치거나 수확이 급감하는 현상을 초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이켜 생각해봅니다. 너무 많이 알아 오히려 자연의 이법에 역행하거나, 자연성(自然性)이 사라지는 경우 그 후유증은 고스란히 우리에게 돌아온다는 원로의 외침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오랫동안 농사에 전념한 원로의 충고라는 점에서 어찌 보면 자연성(自然性)이 가장 자연의 이법에 맞는 앎의 농법인지도 모릅니다. 그러한 다짐에서 비록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지만, 대자연과 대 생명을 아우르는 천연(天然)의 앎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너무나 깊고 심오하기에 더위를 느낄 사이가 없을 정도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