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소멸을 말할 때 우리는 보통 ‘왜 사람들이 남해군을 떠나는가?’를 묻지만, 이는 사태를 올바르게 지적하는 말이 아니다. 정말 물어야 할 것은 ‘왜 남해군에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변을 제대로 제공해 주었느냐이다.
대한민국의 읍·면·동 곳곳이 사라지고 있다.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전국 기초자치단체의 3분의2 이상이 인구 소멸 위험 지역으로 분류되고 있으며, 특히 농산어촌 지역의 인구 감소는 ‘지역소멸’이라는 이름 아래 구체적인 위기로 드러나고 있다. 이런 사실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지만 우리는 ‘소멸’이라는 단어를 너무 쉽게, 너무 가볍게 사용하고 있는 건 아닐까?
지역소멸이란 단순히 인구가 줄고 행정구역이 없어지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누군가의 고향이며, 삶의 배경이고, 공동체의 기억이 깃든 공간이 사라지는 일이다. 오래도록 농사를 지은 땅이 버려지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기며, 논두렁을 돌던 이웃의 안부 인사가 사라지는 일이다. 다시 말해, 지역소멸은 행정이 아니라 사람의 문제이고, 숫자가 아니라 삶의 방식이 사라지는 일이다.
정부는 지난 수십 년간 ‘지역균형발전’이라는 이름 아래 다양한 정책을 펼쳐왔다. 귀농·귀촌 장려금, 출산장려금, 청년 정착지원금 등 인구를 늘리기 위한 정책들이 그 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일시적인 수치 변화를 이끌었을 뿐, 지속 가능한 정착으로 이어진 경우는 드물다. 왜일까? 정작 그 지역에서 살아야 할 이유, 즉 삶의 기반은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역에 사는 것은 단순히 거주지를 옮기는 일이 아니다. 아이가 다닐 수 있는 학교가 있어야 하고, 아플 때 진료를 받을 수 있는 병원이 있어야 한다. 장을 볼 수 있는 마트와 버스를 탈 수 있는 정류장, 문화 활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수많은 지방의 읍·면·동에는 이러한 기반시설이 턱없이 부족하다. 지역은 삶을 이어가기 어려운 공간으로 점점 변해왔고, 그 결과 사람들은 도시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중앙정부의 대응은 어떠했는가. 행정구역 통폐합, 공공기관 이전, 혁신도시 조성 등은 일견 타당한 접근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사람의 삶보다 행정 효율성, 예산 절감 논리에 치우친 대책들이었다. 지역의 미래를 숫자로만 판단하는 중앙의 시선은 오히려 지역주민들을 소외시키고 자율성을 박탈했다. 결국 지역은 중앙정부의 정책 실험장이 되었고, 주민들은 그 결과를 감내해야 했다.
그러나 이 사태의 본질은 다른 데에 있다. 우리가 진정으로 직시해야 할 것은 “왜 그들이 떠났는가”가 아니라, “왜 그곳에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국가와 지역사회가 제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지역은 단지 ‘머무는 곳’이 아니다. 그곳에서 살아가는 이유와 가치, 관계와 돌봄, 자립과 순환이 어우러져야 하는 하나의 생태계다.
최근 일부 지역에서는 새로운 시도가 나타나고 있다. 지역의 역사와 생태, 농업과 문화를 통합한 마을교육과정, 청년 협동조합 중심의 로컬푸드 유통망 구축, 마을 단위의 돌봄 시스템 등이 그것이다. 이들 시도는 단지 행정적 지원을 넘어 주민이 직접 기획하고 운영하는 구조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지역소멸을 막기 위해선 단순한 재정 투입이나 행정 재편이 아니라, 삶의 총체적인 설계가 필요하다. 지역 기반 교육과 돌봄, 의료와 문화, 생태와 산업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중앙이 아니라 지역이 중심이 되어, 스스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갖는 것이다. 결국, 지역소멸은 사람을 위한 질문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왜 여기서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살고 싶은가?’, ‘누구와 함께 살아갈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그 질문에 진지하게 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숫자로 존재하던 지역들을 보내고 나서야, 뒤늦게 그 삶의 풍경을 그리워하게 될 것이다.
지역은 행정의 단위가 아니라 사람들의 생태이고, 공동체의 기억이다. 우리가 지역을 포기한다는 것은 곧, 우리 삶의 다양성과 미래의 가능성을 포기하는 일이다. 사람은 결국 ‘살 수 있는 이유가 있는 곳’에 남는다. 이제 정책이 아닌 ‘삶의 이유’가 지역에 남아야 할 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