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급한 볼일이 있어 차를 타고 읍내로 향합니다. 출발한 지 십여 분 정도, 차는 비교적 한산하기만 한 도로를 달리는데, 이 길을 지나야만 읍내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평소에도 차량의 왕래가 그리 잦은 길이 아닌 유달리 새가 많은 곳이라 그들의 지저귀는 소리에 묻혀 엔진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입니다.
자연의 소리로 대변될 그들의 소리에 매료되는 그 순간 갑자기 날아든 새 한 마리가 필자의 차량 앞에 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갑작스러운 새의 출현에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브레이크를 밟으면서 차를 급히 갓길로 이동합니다. 심호흡으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그와 동시에 “저 새가 방향 감각을 잊어버렸나! 아니면 무디어진 감각으로 착각을 일으킨 것은 아닌가?” 생각하며 시동을 끄고 새에게 다가갑니다. 새가 멈춘 곳이 도로 가장자리여서 다른 차로 인해 다치는 경우가 생기지 않아 다행이지만, 사람이 다가오면 대개 경계를 하거나 날아가는데, 이 새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자리에 서서 고개만 흔들 뿐 날아가려는 동작도 전혀 취하지 않습니다.
분명 무언가 잘못된 것이 분명합니다. 필자로서는 이 상황에서 왜 저 새가 꿈쩍도 하지 않을까? 혹시나 시각이나 청각에 이상이 있어 보거나 듣지 못하여 일어나는 것은 아닌가? 그것도 아니라면 자연환경에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판단 착오를 일으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칫 함부로 다룰 경우 더 위험한 경우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우선 조심히 물을 건네주기로 하였습니다. 마침 차 드렁크에 작은 그릇이 있어 여기에 생수를 부어 새가 마실 수 있을 만큼의 거리에 놓아두었습니다. 그가 물 한 모금이라도 마시고 기운을 차려 하늘로 날아갈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하지만, 새는 물을 마시기는커녕, 사람이 옆에 있어 주저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는 그런 상태로 있을 뿐입니다.
그렇게 살피기를 수 분 후, 마침 옆을 지나는 트럭 한 대의 요란한 기계음 소리에 자극을 받아서인지 요지부동 꼼짝하지 않던 새는 정신을 차린 듯 서너 번 날갯짓을 하다 하늘로 훌쩍 오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기계음 소리에 자극을 받은 나머지 놀라서 하늘로 날아갔다면 그것은 차의 소음에 스트레스를 받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꼼짝도 하지 않던 새가 갑자기 하늘로 오르리라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연유였든 새가 차에 치이지도 않고 무사히 하늘을 날아가게 된 것은 다행이나, 문제는 새가 차 앞으로 날아들기까지 어떠한 과정이 있었기에 행로를 찾지 못했을까 하는 의구심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뭇 생명의 방향 감각 상실이나 이상 증세는 우연한 일이 아니라, 이미 수십 년 전부터 벌들이 사라지고 꽃들이 향기를 내지 못하는 현상이 빈번해지는 현실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지난주 남해신문 기사에는 이상 기후로 인해 단호박이 수정이 안 되어 수확이 절반으로 줄었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있었습니다. 자연 생명에 이상이 발생하여 꽃이 성장하지 못한 것이나, 이에 따라 미물인 나비와 벌 등이 꿀을 채취하지 못하는 현상 등은 기후로 인한 내홍으로 식물이 자라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지 않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어떤 경로로든 우리들의 느낌으로도 확연히 느낄 수 있는 이상 기후는 결국, 부분과 전체가 융합하는 질서에서 한순간이 부재하면 전체 질서가 어떤 결과로 나타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연 생명은 서로 깊이 연결된 공생과 공존의 공동체입니다. 부분이 전체요, 전체가 부분인 어떤 경계도 없이 감각 영식을 나누며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요즈음처럼 미물의 생명조차 함께 살아가지 못하는 시대에 비하면, 우리의 어린 시절 처마 밑에 둥지를 뜬 제비는 비록 미물이지만, 정을 나누던 공생과 공존의 대상이었음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휘파람을 불면 새들이 날아와 어깨에 앉는다든지, 집주인이 밭에서 일하고 돌아올 시간이면 개구리들이 집단으로 몰려와 개굴개굴 소리를 내며 반기며 주인의 몸에 오르기도 하던 이야기를 상기하면 분명 오늘의 시대와는 다른 영적 교감이 있었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영적 교감의 근간에서 주목받는 출세(出世)는 궁극적으로 자연과 사람 간에 믿음이 함축된 고도의 의식 작용이라는 점에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도 하였습니다. 비록 오늘에는 그러한 의식이 뇌리에 남아있을 뿐 이전에 비하면 정으로 나누는 이웃 간의 교류조차 사라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출세의 실상이라 할 자연 생명은 여전히 동시다발로 교감하며 지구 생명은 당신을 위해, 당신은 지구 생명을 위해 존재합니다. 바다는 당신을 위해 존재하며 숲은 당신을 위해 푸르름을 제공하고 새는 당신을 위해 노래하고 있음을 천명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내공으로 긍정을 노래하면 긍정을 보내주고 부정을 이야기하면 부정을 돌려줍니다. 바라는 대로, 느끼는 대로, 감각 하는 대로, 의식하는 대로 자연 생명은 오롯이 당신을 위해 지구 곳곳의 에너지를 전해주고 있기에 우리가 숨을 쉬며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엄연한 자연의 질서이자 생명 의식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의식이 자리잡기도 전에 우리의 삶에 지대하게 영향을 미치는 이상 기후를 실감하며 굳이 환경론자가 아니어도 많은 사람이 이상 기후로 인한 피해가 급증하는 현실을 인정하면서 생명 의식에 공감대를 형성하기 시작합니다. 이상 기후를 되돌릴 요건은 여전히 자연이라는, 숲이라는 또 그 속에서 형성되는 자연성이 근간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주장하면서 말입니다. 이런 흐름을 보면 사람과 자연의 공존 현상. 자연이 살지 못하면 사람 역시 살 수 없다는 초이심전심의 공존과 상생능력을 배양할 구체적 시기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초월과 합일이라는 의식이 자연 속에서 배양할 때라야 잠재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에 유념하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아니 자연성으로 마음을 치유 내지 회복하여야만 전체 생명이 온전히 살아갈 수 있다는 이치를 깨닫는 일대 전환이 필요합니다. 필자와 만난 새의 돌발 행동은 어쩌면 이러한 사실을 깨우치게 하려 목숨마저 염두에 두지 않고 항거한 행보였는지도 모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