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어김없이 동네 앞의 우뚝 솟은 산을 바라봅니다. 늘 보아오는 산으로 형태나 색상이 어제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산입니다. 그럼에도, 매번 똑같은 산형(山形)을 바라보며 느끼는 소회는 마을의 시야를 가리고 있는 저 산 대신 확 트인 바다가 펼쳐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자연적으로 형성된 산을 인위적으로 변형시킬 수는 없지만, 풍수와 기운 따라 마음과 성품이 영향을 받는다면 차라리 시원하게 탁 트인 바다가 더 낫지 않을까 하는 기대 심리라 할까요. 이런 욕망 앞에 산을 깎아 바다를 보게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냐고 항변한다면 산 그 자체를 변화시키지 않으면서, 막힘이나 답답함과 같은 정서를 희석할 방법을 구상해 보리라 다짐도 해봅니다. 

물론 이러한 방법이 실현될지는 가늠하기 어렵지만,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의식을 믿는다면 새로운 방법을 구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필자 역시 이런 사유에 집중하면서 바라보는 관점을 승화시키며 새로움을 더하려 노심초사하는데, 중요한 것은 기존의 시각이 아닌 전혀 새로운 시각을 지닌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어제와는 다른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그 기운 따라 형성될 지기(至氣) 입자는 전혀 다른 성질로 전개될 가능성이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동네 앞산,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바라보는 당사자가 긍정의 상태이면 긍정의 이미지로, 부정의 상태이면 부정의 이미지로 부각 된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생각이 주변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면 틀린 이야기가 아닙니다. 

일상생활에서의 바라보기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어떤 기분으로 인식할 것인가? 이런 물음에 마음을 이루는 입자 알맹이인 지기(至氣)의 광활함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운 세계의 근간이 될 지기(至氣) 입자는 어느 곳이든 미치지 않음이 없고, 간섭하지 않음이 없을 뿐만 아니라, 생각이나 감정 따라 반영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기(至氣)의 실체에서 어떤 형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또한, 그 내밀한 정서에서 유상(有想)과 무상(無想)이 교차하는 동네 앞산의 나무와 식물이 어김없이 똑같은 연녹색이 주류를 이루며 잎과 꽃이 어김없이 상호작용을 하며 결실을 맺고 있는데, 그들 내부에 어떠한 약속이 설정되어 있기에 이것이 가능할까요? 사람이 이러한 담론에 공감할 수 없다 하더라도 색(色), 향(香), 질(質)이 어제와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현상을 체험하기 시작한다면 누구든지 바라보는 대로, 소원한 대로 이루어지는 지기 입자의 잠재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잠재력으로 지금까지 절대적인 생각으로 지니고 있었지만, 마음의 도화선이 될 생각 그 자체는 항상 변하고 있으며 불변은 없다는 가능성에서 세 가지 마음의 단계에 주목해 봅니다. 늘 변할 수 있다는 의지를 담고 있는 첫 번째 마음은 감정을 순화하는 단계입니다. 삼라만상이 마음의 최초 원리인 입자에 의해 움직여지는데, 어느 순간 마음에서 생성되는 지기 입자에서 새로운 정동(靜動)이 발현되면 전혀 새로운 의식이 발동하게 됩니다. 이미 습성화된 감정(생각, 성격)을 넘어서는 단계로서, 이때 기운도 덩달아 새롭게 용솟음치는데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과정이 신선하고 참신하게 느껴지는 감격을 맛봅니다. 

두 번째는 자각을 생성시키는 단계입니다. 생각이나 감정으로 연결된 기운작용을 바라보며 습관화된 과거의 경험에 따른 집착을 만회하고 새롭게 마음을 생성하려는 자각입니다. 생각이나 감정을 일이나 물건, 사람 등에 보낼 때 생성되는 사고(思考) 작용을 정화하는 단계로서, 모든 일과 경험 속에서 일어나는 공, 사간 질서를 살피고 점검하면서 참회 내지 개과천선으로 연결됩니다. 이는 마음을 한층 더 성숙하게 하려는 의지의 발현으로 침묵에 이른 시간을 오랫동안 지닐수록 이러한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세 번째는 성품에 이르는 여정으로서의 단계입니다. 바라보는 마음의 맨 처음 기점을 성품이라 하며 성품은 처음도 끝도 없는 만법만상(萬法萬相)으로 모든 생명이 하나로 통하여 일체가 나와 하나요, 둘이 아닌 기쁨을 누리는 단계입니다. 모든 행위 작용이 경계와 분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체 생명을 키우는 동화작용으로 포용의 원리를 발현하는 이곳이 마음이 시작되는 본래의 성품 자리임을 깨닫게 해줍니다. 

마음으로 보면 만상이 모두 나와 일체인 나의 성품과 마음이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우리가 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욕심(두려움, 분노, 탐욕)에 물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아는 것이 많아도 근본(성품)이 바르지 못하면 삿된 길로 접어들 것이요, 시비로 마음을 제대로 안정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 바라보는 것이 어제와 다를 바 없다면, 살아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마음은 진심과 진실, 욕심으로 얼룩진 습관의 마음과 내 생각이 옳다는 사심이 흙탕물처럼 뒤섞여 있습니다. 

이처럼 시끄럽고 흙탕물로 가득한 마음을 바라보며 완벽하게 변화시키기가 힘들지라도 마음을 달리하고 바라볼 수 있다면, 일만 이치를 깨달을 소지는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이것은 언제든 바라보기만으로 가능하며 우리는 얼마든지 어제와는 다른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습니다.

어제와는 다른 오늘은 모든 현상이 시작되는 생애 첫날입니다. 긍정으로 보면 긍정의 이미지로, 부정으로 보면 부정의 이미지로 다가옵니다. 어떤 감정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의(義)와 기(氣)가 정해진다면 이처럼 신묘한 지기(至氣)의 생성 작용을 어찌 도외시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일의 유무가 그렇듯, 어떤 유형의 산이라도 달리 인식할 수 있다면, 인생에서 처음 만나는 경이로운 산은 항상 우리의 곁에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때로는 산이 기운의 흐름을 막는 것 같은 아쉬움도 있지만, 어제 본 산, 들, 논, 길, 물, 바람, 사람일지라도 마음을 달리하고 보니 한없이 새롭고 새로운 걸림 없는 자유심(自由心)의 경지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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