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봄이 한창 무르익을 이맘때쯤이면, 대개 마을마다 어르신 경로잔치나 관광을 실시합니다. 이러한 행사가 언제부터 실시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이제는 마을마다 연중 가장 중요한 행사로 자리매김한 듯합니다.
필자가 거주하고 있는 마을 역시 예외는 아닙니다. 필자가 이러한 행사에 반색하는 것은 요즈음처럼 어른을 공경하는 풍조가 사라지는 현실에서 마을마다 이러한 행사를 연다는 것은 여전히 도덕이나 윤리가 살아있다는 것을 방증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타 체육대회 등의 행사에도 어르신이 참여하지만, 공경의 의미가 담긴 행사라는 점에서 어느 행사보다 의미가 깊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성격을 지닌 어르신의 경로잔치 날, 한편으로는 대부분 어르신이 요양 보호시설을 이용하는 탓에 예전과 같은 참여를 기대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이에 따라 마을 전체가 공동화 현상으로 치닫는, 묵과할 수 없는 현실도 마주해야 하는 안타까움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행이 지닌 묘미를 생각하면 마치 어린아이처럼 들뜬 기분을 추스르기 어려운 것이 여행의 매력이기도 합니다. 더군다나 이날은 날씨가 너무 좋아 봄나들이하기에는 안성맞춤이어서 더욱 그러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필자 역시 가벼운 옷차림으로, 마을회관으로 향하기 위해 대문을 나서는데, 집 주변에 가득한 봄의 향기마저 여행에 함께 하자고 미소 지으며 달려오는 듯합니다. 두 대의 버스가 대기하고 있는 마을회관 앞에서 어르신은 모처럼의 나들이가 반가운 듯 삼삼오오 즐겁게 담소를 나누며 지정된 차에 승차합니다. 달리는 차의 창문 밖으로 펼쳐지는 벚꽃의 기세가 다소 누그러진 듯하지만, 여전히 하얀 잎을 사방팔방 날리는데, 피고 지는 생명의 오묘함이 신비로움을 더해줍니다.
여행 중에 잎새를 응시하며 사색하는 순간, 그들 역시 가늘고 긴 봄바람에 업혀 여행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합니다. 벚꽃의 여행, 하지만 그들의 여행은 우리들의 여행이 무색할 정도로 순환과 법칙에 순응하는 여정이어서 가슴으로 느끼는 감회가 더욱 새롭게 다가옵니다. 그들의 여행은 떠나야만 다시 회생할 수 있다는, 생명의 리듬이 깃들어 있는 여행이기 때문입니다. 떠나야만 아니 떨쳐내야만 다시 회생할 수 있다는 생명의 리듬에 충실한 여행. 그렇다면 우리 여행도 이러한 행보를 담보한 여행이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기존의 것을 떨쳐내기 위한 행보, 고정되고 관념화된 습성을 새로운 탐구를 통하여 변화시켜 나가는 과정으로서의 여행. 그렇군요. 이것이 여행의 진미임은 분명하지만, 지난 한 인생길에 우리는 수없이 많은 여행을 하면서도, 어제와 같은 듯 다르기만 한 여행의 진미를 전혀 느끼지 못한 채 살아오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제와 같은 듯하면서도 다른 여행. 어찌 보면 본래 내가 있던 자리를 떠나가는 형국이라기보다 늘 걷던 길도 이 순간의 몰입으로 보면 전혀 새로운 경험이요, 늘 반복되는 일이라 해도 오늘에서 보면 또 새로운 기상이 기려지는 특별한 여행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버스 안에서 풍기는 어르신의 설렘, 버스 밖에서 펼쳐지는 벚꽃잎의 기상에 매료되는 순간, 들려오는 유행의 음악 소리에 젖으며 보는 것, 듣는 것, 맛보는 것, 느끼는 것, 냄새 맡는 것이 욕망을 자극하는 애달픔도 있습니다. 얼마나 고독하였을까요? 얼마나 외로웠을까요? 인간의 심성을 짓누르는 허무의 장에 쌓인 감정을 해소하는데, 발산 이상의 방법이 있을까를 생각하면 그러한 기회가 상실된 농가(農家)의 현실에 착잡한 심정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언제 속 시원히 마음속에 품고 있던 감정들을 노래로, 춤으로 발산할 기회가 있었는가를 생각하면 명상하는 필자의 입장에서는 감정을 발산하는 행위로서 유희의 측면을 전혀 무시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경로(敬老)의 의미를 자각하는 여행이 보고 듣고 먹는 것으로 치우칠 공산이면 여행을 통해 느낄 수 있는 순환이나 변화의 조짐은 약화할 수밖에 없는 아쉬움이 남아돌기도 합니다.
이에 필자는 연륜과 경륜을 추앙하며 효와 예를 배양하는 경로잔치 여행을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맞이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떨어지는 벚꽃 잎새마냥, 떨어지고 떨쳐내야만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는 것처럼. 묵은 것과 새로운 것이 교차하는 행보로서 이를테면 연륜과 경륜의 이미지와 어린이 마음의 표상이라 할 천심(天心)이 만나는 것입니다. 즉 어르신의 연륜과 아이의 천심이 마을에서 함께하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을 하면, 요즈음과 같은 시대에 마을에 어린이가 어디에 있느냐고 항변하겠지만, 도시에 사는 어르신의 손자나 손녀를 마을에 초빙하여 함께 어우르는 시간을 가진다면 그리 어려운 문제도 아닐 것입니다. “저 아이는 누구네 손자네, 아! 그 애가 저리 많이 컸나. 길 가다 만나도 못 알아보겠네”라는 담소가 자연스러운 친근함으로 연결될 수 있다면 그 옛날의 정서가 다시 살아날 수 있지 않을까요. 어르신과 아이가 함께 어우르는 마을 잔치, 어르신은 아이의 마음을 통하여 순수한 기운을 섭렵할 수 있고, 아이는 경험과 연륜이 쌓인 어르신의 사랑을 여과 없이 담아낼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의미 있는 잔치도 없을 것입니다.
아이와 함께하는 어르신 경로잔치, 아이의 숨결이 남아도는 마을 분위기, 도시와 농촌 간의 심각한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며, 신생과 연륜의 교감을 통하여 새로운 가치를 부여할 수 있는 경로잔치라면 그 의미가 얼마나 깊고 아름답겠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