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선행 의식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여러 의식 중에서 우리의 육안에는 보이지 않지만, 믿음과 같은 순연한 내면의 활동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물론 밖으로 표출되는 생각과 감정 역시 선행 의식을 이끄는 주체가 되기도 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믿음과 신뢰와 같은 의식이 없다면 생각과 감정은 자칫 공허와 허무를 양상할 뿐입니다. 아무리 좋은 생각과 감정을 지니고 있어도 믿음이 없으면, 성사시키기가 어려울 것이고, 의식이나 지혜를 갖추었다 해도 믿음이 없으면 신뢰를 얻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왜 필요한가는 차치하더라도 오늘과 같은 물질 세상에 믿음은 사람의 마음과 정신을 성장시키는 모체가 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만약 우리가 물질뿐만이 아니라, 정신세계마저 믿음으로 통찰하지 못한다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닐뿐더러, 삶 그 자체가 어떻게 전개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공유하는 자세야말로 우리가 필연적으로 담아내야 할 정신적 유산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믿음이 지니는 힘이 얼마나 큰 것인지는 사람마다 나타나는 기국이 달라 예측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형국일지라도 믿음은 정신 건강을 주도할 에너지로서 세상과 교감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감각 영식으로 보면 이 세상은 고도로 물질화된 고체 덩어리처럼 보일지라도, 실상 세계는 믿음의 입자가 형상화된 세상 그 자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필자가 특히 믿음 입자의 형상화에 주목하는 것은 사람의 역할을 반등시킬 마지막 보루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로봇이나 인공 지능이 첨삭된 AI 시대에 사람의 능력을 견지할 믿음이 상실된다면, 사람이 할 수 있는 능력이 자칫 소멸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런 정황에서 어떠한 악조건 속에서도 믿음을 담아내야 하는 것은 잠재된 믿음의 위력이 대단하기 때문입니다, 믿는 대로 된다거나 믿음으로 생성된 의식은 기적을 일으키기도 하는데 우리가 잘 아는 플라시보 효과 등이 그렇습니다. 

믿음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가는 추정할 수 없지만, 믿음 입자 자체는 지극한 기운으로 서로 연결되어 반응하고 있기에 믿음의 실상을 가볍게 여겨서도 안 될 것입니다. 믿음의 효율성에서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믿음이 없으면 성사될 수 없고,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믿음이 있으면 일을 성취할 수 있으니 믿음 그 자체야말로 성장의 촉진제가 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특히, 믿음이 가시화되면 기적이 일어날 수 있다는 믿음의 상승효과가 있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믿음을 정착시키는 데 여러 방법이 있습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불신이 가중된 상태에서 믿음을 어떻게 정착시킬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마음을 고요히 한다거나, 심호흡으로 기운을 가라앉히는 방법이 있긴 합니다만 중요한 것은 상대의 입장에서 돌아보는 여유로움이 아닐지 생각해 봅니다. 불신으로 사이가 멀어진 상태에서 갈등이 지속된다고 하더라도 그의 입장을 3번, 4번 혹은 뼛속같이 생각해 본다면 차이에서 드러날 따름인 경계를 지우고 믿음이 가시화하는 기쁨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와 불편한 관계 속에 있는 아무개, 그의 입장을 헤아려보면 어린 시절의 쓰라린 상처가 원인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사랑이나 칭찬을 받지 못한 채 차별화된 가정에서 억눌린 심정으로 자란 탓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역으로, 연륜으로 가시화된 선대 어르신은 지금의 환경보다 더 열악한 상태에서 지냈다고 가정한다면, 그래서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가족 구성원 간에 불협화음이 조성된 나머지 그 아픔과 상처가 후대의 성격 형성에 지대하게 영향을 미치게 했다면 누구인들 용서하지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만약에 이를 인정하지 않고 불신이 심화할수록 자신이 더욱 고통을 받는다는 믿음 부재의 현상에 둔감해진다면 이보다 더 우매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믿음은 신뢰를 쌓고 좋은 기운과 대긍정의 심리를 유지하기에 작은 일 하나라도 “나는 너를 믿지 못하겠어, 도저히 믿을 수 없고, 신뢰할 수 없기에 함께 할 수 없어”라는 이 한마디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낳는지, 그 실체에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 누구와 불화를 겪고 이것을 해소하지 못한 채 상처를 안고 생을 마감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특히 가족이나 친지, 친구라면 말입니다. 내가 나를 믿고 내 가족을 믿고, 나와 마을 공동체를 믿는 일편심으로 신뢰하는 분위기라면 어떠한 난관이라도 능히 극복할 수 있는 기적을 연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음이 가시화된 응집된 마음이 일편심입니다, 일편심은 당신과 나는 둘이 아니요, 완전한 생명으로서 하나의 마음으로 귀결된 영원한 생명체임을 표방하는 약속이자 다짐입니다. 어떠한 거리도, 거리낌도 없는 이러한 인간관계가 가능한지 짐작하기 어렵지만, 믿음만 있으면 그리 난해한 문제도 아닐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돌을 굴리어 산에 오르기도 쉽고, 믿음이 없으면 돌을 굴리어 산에서 내려오기도 쉽지 않습니다. 

결론으로 말하면 당신의 순수한 믿음 에너지는 영원히 존재할 것이고 후손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할 것입니다. 이전 같으면 벼슬이 가문의 영예로 자리매김했겠지만, 인심 좋고 선량하였으며 성품이 인자하다는 믿음의 에너지장은 지구에 오랫동안 저장되고 기억될 최고의 유산임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믿음이 또한,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자 후손에게 자리매김할 업적이라면 믿음을 내면화하는데, 한 치라도 주저함이 없어야 할 것입니다. 불신이 가중된 오늘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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