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의 은혜를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마시는 공기와 깨끗한 물, 땅의 정기와 바람과 나무와 해와 달과 별이 생명에 미치는 정도를 생각하면, 자연이야말로 생명의 최후 보루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욱 자연의 은혜를 깊이 생각하고 존중의 예를 다하여야 한다고 다짐해 봅니다. 

자연은 우리를 태어나게 하고, 자라고 키워주는 부모와 같은 존재입니다. 사람이 성장하는데 천지자연의 기운이 없으면 우리가 어떻게 성장을 도모할 것이며, 양육의 관점에서도 음과 양이 교차하는 기운을 섭렵하지 못한다면 균형 있는 성장을 도모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런 현상을 보면 우리가 부모의 은덕을 잊지 않듯이, 자연 즉 천지의 은덕 또한 감사의 대상임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그러함에도 자연을 늘 접하는 우리들은 자연과 너무나 가까운 탓에 오히려 자연의 고마움을 잊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떤 때는 무분별하게 자연을 훼손하면서, 인간의 욕망이나 욕구 충족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도 있어, 자연에 대한 보은 심리가 사라지는 듯한 안타까움을 맛보기도 합니다. 이러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데도 만약에 자연을 더욱더 훼손하려 한다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그 심각성을 대변하면 오존층이 막히고 대기가 번복하면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로 지구 환경이 바뀌고 있다는 사실에 생명 윤리를 통하여 이를 치유하기에는 시간적으로도 매우 늦은 감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례에서 특히 무덥고 습한 기운이 범람하던 작년 6월, 견디기 힘들 정도의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 농촌에서는 작물이 출하 시기를 놓쳐 막대한 손실을 입거나, 바다에서는 기온이 상승하여 고기가 때 죽음을 당하던 일을 생각하면 자연의 이상 현상에 마음 고생하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어디 이뿐이겠습니까? 매서운 한파를 동반한 지난 겨울에는 감기 환자가 급증하였는데, 이전과 달리 한번 감기에 걸리면 쉽게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자칫 폐렴으로 이어지기도 하여 그 심각성이 극에 달하기도 하였습니다. 심지어 어떤 젊은 분은 감기로 병원에 입원했는데, 입원한 지 3일 만에 숨졌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세균과 바이러스의 기세에 놀라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러한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생각하면 이상 기후나 코로나로 인한 변종 세균의 가세가 원인이 되기도 하지만, 만약 자연을 경시하였거나 상하게 한 것으로부터 이러한 증상이 도래하였다면 앞으로는 사람이 살 수 없을 정도로 더 무서운 재앙이 오리라는 우려 섞인 전망을 내놓기도 합니다. 자연과 질병과의 관계에서 자연이 훼손되면 질병이 범람한다는 논리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청결과 순수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그러한 생태적 감각이 그들 삶을 움직이게 하는 주체라는 것을 인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순수를 배양하는 일이나 자연의 원형을 찾는 일은 그들만이 아니라 전체 생명의 본래 성품을 찾는 여정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자연이 간직하고 있는 순수 본래의 의미에 열광하게 되고, 그러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애를 쓰는 것입니다. 

자연은 항시 순환한다는 원리에서 에너지 입자는 동식물은 물론 무생물에도 반응한다는 사례는 우리 주변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내 생각과 감정에 완벽히 반응하는 자연의 순수 섭리를 거스르지 않으려면, 나 자신 또한 순수 본래성을 확보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직감하게 됩니다. 이는 사람이 먹는 생각을 자연이 모를 리 없고, 생각이나 감정 따라 형성되는 자연의 에너지가 전체 생명에게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다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유에서 내 생각과 감정이 온전치 못할 경우, 자연 또한 이에 상응하는 감정을 지닐 수 있다는 점에서 만약 이를 외면할 경우 종국엔 사람마저 자연으로부터 더 무서운 위해를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 공기를 훼손치 말며, 한 그루의 나무라도 혼탁하게 하지 말며, 오염된 물을 뿌리지 말며, 독한 연기나 매연으로 생명에 위해를 가하지 말며, 이로써 나타나는 질환을 유추해보면 그것이 코로나이고 요즈음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는 미세 플라스틱 문제가 아닌가 단언해 봅니다. 

코로나와 미세 플라스틱 문제는 자연을 거스른 데서 발생한 측면이 더 크기 때문입니다. 더 편하고 빨리, 더 신속하게라는 구호 이래 전개된 무한 벌목이 대량생산으로 이어지고 일회용의 재료가 되기도 합니다. 다분히 생각이나 감정이 빌미가 되어 심신 부조화의 상태가 만연되고, 이로써 사람들이 괴질에 시달리는 형국이 된다면 당연히 경각심을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특히 분해되고 조각나는 플라스틱 입자는 극소의 미세한 조각으로 양분되어 동식물이나 바닷고기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으며, 순환의 고리에서 그 고기를 사람이 먹고, 사람으로부터 분비된 플라스틱은 자연에까지 영향을 줄 정도라면 이 망국적 현상을 어떻게 치유하여야만 자연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을까요. 

이런 생명 부재 현상은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만, 죽음의 그림자가 목전에 다가와 있는데도 참으로 무지한 사람의 자연 위해의 현장을 목도하노라면 욕망의 사슬에 묶인 그들의 행보가 어떤 때는 측은하기까지 합니다. 도덕이나 윤리적인 측면에서도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원소를 공급해주는 자연을 대상으로 무지한 침탈을 행하는 인간의 욕망은 결국 인간 자신을 피폐하게 하는 원인이 될 뿐이어서 참으로 두렵기까지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망국적 위기를 어떻게 극복해가는 것이 좋을까요. 그것은 사람에게 내재한 자연의 본래성(自然性)을 회복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연성은 본래의 성품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성품으로 돌아가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자연성을 찾는 일에 대한 신념으로 우리의 마음을 돌아본다면 그리 난해한 문제도 아닐 것입니다. 일신의 안락을 위한 욕망 충족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살림을 권장하는 자연성을 찾는 일 그것이 또한 봄의 마음이, 봄을 맞이한 우리에게 보내는 말이자 신신당부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저작권자 © 남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