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이면 생각나는 일이 있습니다. 이미 수십 년 전의 이야기이지만, 필자의 작은 할아버지가 만들어준 연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연에 얽힌 이야기라고 한 것을 두고 연에 관한 특별한 이야기나 추억담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연과 어떤 사건의 연관성이라든지, 연을 매개로 한 인간관계의 정립이나 권선징악을 예상하기도 하고 반전을 거듭하는 스토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의외로 단순한 이야깃거리입니다만, 필자로서는 그때 받은 느낌이 너무나 강렬하였기에 생애 처음으로 느낀 연에 대한 솔깃한 기분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당시로서는 농경 시대의 도구나 생활용품 등은 기존부터 물려받은 것이 주종인 터여서 물건 하나라도 새로운 것을 만날 때면 호기심이 증폭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때 접하게 된 연은 필자의 마음을 송두리째 앗아갈 정도로 신기함 그 자체였습니다. 더군다나 작은할아버지가 정성을 다해 만들어 준 연이었기에 그에 대한 애정은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그냥 만들어 주었다는 자체에 매료된 것이 조금은 멋쩍기는 하지만, 얼마나 귀하게 여겼으면, 연을 하늘에 날리지도 못하고 애지중지 가슴에 품고 간직할 정도였으니까요. 아마 필자가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은 심정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늘을 나는 연, 지금도 종종 연 보존회 회원들이나 동호인들이 전통 행사 날에 연 날리는 시연을 하고 있지만, 옛 동심에서 느꼈던 감응이 사라진 것은 두고두고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같은 연이라 해도 시대정신으로 남아돌 교훈이나 귀감 되는 이야깃거리를 찾아보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다는 반증인지도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사람이 살아가는데 물질 위주의 삶에 치중한 나머지 인간이 지녀야 할 순수 본성에 대한 의미는 망각한 채 살아가고 있을 정도로 시대가 변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마음에 남아있을 정이나 품성마저 사라져서도, 사라지게 방관해서도 안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필자만의 소견일까요. 그러한 맥락에서 옛 정서가 물씬 풍기는 고품을 바라보면 요즈음 시대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영롱한 지혜가 스며있다는 것을 느끼곤 합니다. 그 지혜 속에는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영혼과 순수 지성이 바탕이 됨은 물론 실용적 기능마저 연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게, 똥장군, 물 푸는 두레박, 따바리, 물레, 연, 썰매, 장독, 물바가지, 화롯불, 등잔, 짚신 등이 그렇습니다. 이렇듯 자연의 조화와 음양 이치를 통찰하는 지혜 속에서 특히 하늘을 영역에 둔 연날리기와 밤하늘에 빛나는 별을 보는 즐거움은 백미 중의 백미였습니다. 

지금도 밤하늘에는 별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지만, 어찌하여 옛날과 같은 정감 어린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일 정도입니다. 북두칠성을 가리키며 속삭이기도 하고, 황홀한 별자리에 매료되고 떨어지는 별똥에 눈길을 주며 밤하늘을 장식하는 수많은 별을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누가 더 많이 세는가를 논하던 그 시절 감성이 더욱 그리워질 따름입니다. 그만큼 한 시대를 풍미할 인생에서 어린 시절의 경험만큼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돈 추억이 있을까를 생각하면, 우리의 마음에 남아있을 연이나 밤에 헤아려보는 별자리 이야기는 어린이의 마음을 상징할 영혼의 표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이런 추억담을 생각하면 성인이나 철학자들이 한결같이 어린 마음으로 돌아가라거나 어린이의 마음이 신(神)의 마음이라고 일갈하는 데도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단언해 봅니다. 노자는 성인개해지(聖人皆孩之)를 통하여 심후한 수양의 경지를 어린아이의 순진유화(純眞柔和)한 경지에 비유하면서 ‘어린이는 욕망이 욕망으로써 분리되지 않은 상태’이며, 성인은 천하에 임할 때 분별심 없이 행하며, 백성이 모두 귀와 눈을 곤두세우며 경쟁하려 할 때 성인은 그들을 모두 어린아이로 만든다고 하였습니다. 

이를 보면 영이나 영혼의 밝음은 어떤 현상이 갑자기 나타난다거나, 신비한 조화가 눈 앞에 펼쳐지는 현상적 측면보다 오히려 우리 자신의 마음 안에 내재한 어린이의 마음, 그 맑고 순수한 마음을 되살려내는 일이 아닐까 여겨봅니다. 

물론 시대의 변천에 따라 이러한 결기가 희석되어가는 것이 현실이지만, 어지럽고 혼돈의 세상을 바로 잡는 데에는 제도나 조직적인 외형보다 영혼의 시대를 펼치는 것이 정도(正道)의 길이라면 이를 전혀 도외시하여서도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영혼이 사라진 세상, 옛 선각자가 이야기하던 신비적 신과 신비적 영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사람의 존재와 뿌리가 사라지고 사람이 나고 죽는 것이 마치 길가에 무심히 났다가 무심히 시들어가는 한 포기 잡초와 다를 바 없는 세상에서 부의 축적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이며, 권세나 명예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필자로서도 세월이 감에 따라 몸도 마음도 영혼도 이전과 같은 감각을 지닐지 염려가 되지만, 그래도 어린 시절의 품성을 회복할 것이라는 다짐을 놓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노년에 가까울수록 순수 지평을 반드시 열어야 하며, 차고 채우기만 하는 연륜은 집착과 비애의 고통만 양산할 뿐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는 운명과도 같은 인생 행보에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필자는 명상의 화두도 영혼의 산실은 있는 이 자리에서 비어 고요함의 가치를 스스럼없이 부여하는 용기와 결단 속에서만이 인간의 영혼이 재생할 길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해 봅니다. 

이러한 목적에 부응하며 다소곳이 필자의 가슴에 새겨진 영혼이 밝게 피어오르던 시절, 들판에서 연을 날리며 밤하늘 별자리를 보던 내심에 순수 영혼이 더해지던 그때의 2월이 참으로 그리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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