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디찬 겨울바람이 옷깃을 스칩니다. 사계절의 마지막을 장식할 겨울의 땅속에 잠재된 씨앗이 움을 틔우기 위해 내뱉는 숨결이 대지를 더욱 차갑게 만듭니다. 냉함과 온화가 교차하는 대지의 용트림에 추위마저 긴장한 듯 주변을 얼어붙게 하며 몇 해 전부터 불어오는 북극의 찬 공기로 인해 앞으로는 더욱 추워질 것이라는 예단에 마음마저 얼어붙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겨울 추위를 능가할 정녕 사람을 긴장되게 하고 얼어붙게 만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살아있을 것 같은 분이 어느 날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영영 볼 수 없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입니다. 인연의 단절이 가져오는 안타깝고 허전한 마음 길이 겨울의 추위처럼 마음을 더욱 쓸쓸하고 냉랭하게 만듭니다. 

필자가 그런 느낌으로 소회를 밝히는 것은 얼마 전 돌아가신 임과의 인연이 기억으로 남아돌기 때문입니다. 작년 여름, 필자가 두릅 농사에 전념하며 논두렁에 뻗쳐나온 억센 잡초를 뽑을 때 “형님! 더운데 고생 많습니다”라며 격려하며 미소짓던 그가 투병 생활을 할 때 호흡을 통한 명상을 권하며 사랑과 감사를 담아 담소를 나누던 시간이 엊그제 같았는데, 이제 그가 떠난 빈자리를 아쉬워하며 지난해 그와 대화하던 농로에서 님의 명복을 기원해 봅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맞이하는 이별의 심정이 아물어지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소요되겠지만, 삶이란 곧 죽음이라는 운명에 동화될 수밖에 없는 심정에 가슴이 메어옴을 느낍니다. 그러면서도 살고 죽는 것이 생명 순환의 과정으로 인지된다고 하여도 우리 모두의 가슴에 담긴 죽음의 예단에 대해 나라고 예외일 수 없다는 운명론에 주목합니다. 죽음은 누구나 맞이하는데 그렇다면, 생명의 순환이라는 명제에서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죽음의 본질은 무엇이며, 죽음은 과연 허무한 것인가? 삶의 저쪽 편에 있는 미지의 영역인 죽음. 어차피 사람은 이내 죽을 운명이라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의미를 무엇에 두어야 하는가에 대해 성찰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죽음을 상상하면 조금은 난해한 문제이긴 하지만, 죽음 역시 생명의 원리이자 생명 화생의 한 과정이라는 점을 인정하고 순환의 과정에 깊고 넓게 드리워진 초유의 감각을 성찰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마치 낙엽이 지고 새싹이 돋아나지 않으면, 나무가 자라지 못하듯이 개체 생명의 낙엽이 지는 것은 결코 허무한 일이 아니요, 나무라는 대 생명을 유지 발전시키려는 신진대사의 과정이라면 죽음은 곧 살림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죄악의 결과로서 오는 것이 아니고, 생명 진화의 당연한 결과로서 오는 자연의 이법이며, 자연의 신진대사이며, 대자연의 호흡입니다. 즉 전체 생명의 발전을 돕는 최선의 작용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소멸, 사라짐의 멸(滅)이 아니라, 개체 생의 전체 생(生) 함으로 이어지는 대 생명 조화의 원리입니다. 

각각의 생명, 개체 생명은 죽음이 있지만, 전체 생명은 죽음이 없습니다. 모든 생명은 무한한 자기 발전과 창조의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죽음은 대 생명(전체 생명)의 진화 과정이며, 발전이며, 창조 과정입니다. 어떤 생명이든지 신진대사를 거치지 않고는 생명을 유지하고 발전할 수 없습니다. 나라는 생명은 살아있는 세포의 집합체입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살아있는 세포들의 끊임없는 신진대사를 통하여 생명이 유지되고 변화 발전을 이룹니다. 

또 한편, 나라는 개체 생명은 인류라는 큰 나무의 한 열매에 불과합니다. 내가 죽어야 산다는 말도 이러한 것을 의미합니다. 인류라는 전체 생명은 낡고 부패한 것을 새롭고 신선한 것으로 창조할 수 없다면 인류라는 나무는 발전할 수 없습니다. 이르므로 넓고 광활한 순환의 원리에서 보면 죽음은 또한 삶의 한 형태입니다. 죽음은 삶에 반대되는 극이 아니요, 삶의 한 과정이요, 리듬일 뿐입니다. 시간적으로도 개체 생명은 독립된 존재가 아니요, 생명의 시원으로부터 계승되어 영원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존재합니다. 

그런 연장에서 자기의 조상이나 그 이전의 조상이 이미 돌아가고 현재는 없지만, 모두 자기 안에 살아있으며, 수천만 대까지 자기 자손들 생명의 씨앗 역시 자기 안에 살아있다면 죽음은 곧 과거, 현재, 미래 삶의 총합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이치가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죽음은 자기가 죽어도 죽는 게 아니라, 소멸하는 게 아니라, 영원히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거룩한 생명의 화음이 지금도 우리의 가슴을 적시고 있지만, 생애의 와중에 맞이하는 오늘, 차갑고 냉랭한 겨울바람의 한가운데에서 살아 숨 쉬는 우리는 어쩌면 다시 망각에 빠질지도 모릅니다. 죽음이라는 피안의 세계에 도사린 버릇된 습관의 굴레가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실로 살려면 죽어야 한다는 현자의 말이 맞는지도 모릅니다. 이때의 죽음은 육신의 사라짐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신의 습생인 에고(자아의식)를 여과 없이 죽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나라는 자아의식은 살아 생동하는 현실을 고착화하고 분리하며 급기야는 파괴해 버리기도 하는데, 이러한 분열과 분쟁과 왜곡을 일삼는 자아 그 자체를 죽여야만 비로소 살 수 있다는 논리라면 죽음은 또 다른 차원으로 승화합니다. 생즉필사(生卽必死)요, 사즉필생(死卽必生) 이듯이. 그러므로 살아남은 자 다시 살기 위해서 지금까지의 관념을 넘어 무언가 새로운 다짐으로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 일이 무엇이든, 다만 종전처럼 내가 살기 위해서라는 단서로 “남이야 어떻게 살든 내가 살기 위해서, 아니 살아남기 위해서”라는 저 무서운 분별의 심리를 거두지 않는 한 나는 살 수 없다는, 아니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되새기면서. 내가 죽어야 살 수 있다는 진리의 말이 귓전을 맴돌 때 임을 떠나보낸 아쉬움으로 가득한 마음 한 곳에는 내가 죽어야만 필연코 살 수 있다는 샘물 같은 자긍심이 용솟음치듯 내면을 장식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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