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예술가를 죽인 건 과연 누구일까. 유년시절 기억을 꺼내보면 너나없이 그림을 그리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곧잘 춤을 추고 있었다. 아이의 그 많던 유희를 가로챈 건 누굴까? 피아노를 가르쳐 주던 선생님에게 손등에 맞던 30센티 자의 서늘함이었을까? 어린 시절 미술학원에 밀어 넣을 때는 언제고 중학생부터는 수학학원으로 보내던 엄마일까? 그렇게 잘한다 추켜세울 땐 언제고 가수하겠다들면 철이 덜 들었냐는 눈빛을 보내기 일쑤다. ‘예술’을 업으로 하는 것만큼 ‘공포’스러운 일이 없다는 게 은연중에 만연돼있는 시대.

특히나 음악은 ‘천재의 전유물’ 같다는 인식으로 더더욱 손에 잡히지 않는 희망 고문 같았다는 권월 씨. 1990년생. 참 좋은 나이지만 유독 예술한다는 사람에게 ‘서른 즈음’이란 나이는 빛바랜 노인의 나라처럼 여겨져 먼저 움츠러들곤 한다. 하지만 이 모든 편견에도 끝없이 굴레를 끌어 올리는 시지프스처럼 권월은 자기 자신을 스무스(smooth)하게 넘어버린다. 

권승근이라는 본래의 이름을 내려놓고 ‘넘을 월, 초월할 월(越)’이라는 뜻이 좋아 스스로 붙인 이름, ‘권월’ 올해 서른하나가 된 그를 상주에서 만났다. 

연희동에서 음악하던 청년, 삼동면을 만나 이제는 상주 바다로
큰 키에 이국적인 마스크. 언뜻 보면 영국 탐정 ‘셜록’을 맡았던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를 연상시키는 외모의 청년 권월 씨는 남해로 오기 전까지 서울 연희동에서 영화음악 작업을 하면서 짬짬이 작곡과 피아노를 가르치던 강사였다. 그런 그가 지난해 4월 끝에서 끝, 보물섬 남해로 왔다. 

권 씨는 “인천이 고향이라 그랬는지 늘 바다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서울에서의 삶은 늘 불안과의 투쟁이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과의 과잉 경쟁 사회였다. 제아무리 재능이 넘친다 할지라도 치열하게 검색해야 하고 치밀하게 자신을 알려내야 겨우 한자리 얻을 정도였으니 끝내는 ‘꼭 이렇게까지 해야만 하나’라는 자괴감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그 와중에 삼동면에서 남해살기를 한 건 ‘환경을 바꿔보면 정말 바뀔까?’하는 의구심에서 시작되었고, 그걸 시도해보기 위한 ‘무모한 결정’이었다. 무모한 결정으로 인해 그의 삶에 설렘이 찾아왔다. 

그는 말했다. “사람은 환경의 동물이 맞더라. 영화 ‘레볼루셔니로드’를 좋아하는데 극중 디카프리오가 ‘파리로의 이주’를 동경하지 않나. 남해에서의 삶이 마치 디카프리오가 꿈꾸던 파리의 삶 같다. 내가 꿈꾸는 이상향은 매일 바다를 보며 작업하는 것인데, 그 이상을 이뤄졌다. 금산의 기운을 받아 활력도 얻고 삶의 질이 나아지니 작업의 질도 좋아졌다”.

‘효율’로부터 자유로울 때 진짜 원하는 삶과 닿을 수 있다
피아노도 치고 첼로와 바이올린도 배웠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건 미술이라 생각했었다는 권월씨. 만화가나 캐릭터디자이너를 동경하며 낙서를 좋아하던 청소년이었다고. 하지만 특별히 뭘 잘하는지, 자신감도 없던 상태였다고. 그러던 중 고교2학년 미국 오하이오로 가서 겪은 교환학생시절이 전환점이 되었다고.

그는 “미국에선 학교 마치니 할 게 없더라. 마침 하숙하던 집 거실에 피아노가 있었다. 그전까지 내게 있어 음악은 강제로 끌려다니며 한 거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효율’을 내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 놓이자 내가 나를 탐구할 충분한 시간이 생겼고 그러면서 알게 되었다. 내가 진심으로 음악을 하고 싶어하는 거구나. 애정이 있구나 하고…” 그의 말에서 ‘누구에게나 이런 시간이 있어야 한다. 남해에서의 삶은 이런 시간을 줄 수 있는 삶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훅 들어왔다. 그렇게 영국 골드스미스 대학교에서 음악을 전공하고 아버지의 조언에 힘을 얻어 ‘영화음악 감독’을 향해 한 발 한 발 내딛었다.

‘작곡’도 원데이클래스가 된다?! 남해에서 ‘음악’을 하며 산다는 건

그의 일상은 크게 음악과 관련한 강의/공연/개인 작업(앨범) 이 3가지 카테고리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삶의 바탕엔 언제나 음악이 흐른다. 작업의 내용도 아예 달라졌다. 서울에서는 주로 ‘단칸방의 일상’, ‘청년 고독사’ 등이었다면 이곳 남해에서는 ‘오리, 학, 수달, 휴양림, 파도, 할머니, 지역사회’ 등으로 외연도 넓어지면서 따뜻해졌다. 그렇게 좀 더 생산적이고 건전한 희망이 생기는 것 같다고. 남해에서 처음 한달살기를 한 경험을 바탕으로 ‘삼동면’이라는 앨범을 내기도 하고, 남해청년센터에서 ‘관현악 풍경’이란 주제로 공연도 가졌다며 청년정책지원에 감사를 전하기도 했다.

권 월 씨는 “작곡도 취미가 될 수 있다는 걸 알리고 싶다. 유독 음악에 대해선 진입장벽이 높고 피아노가 가지는 물성 때문에 쉽게 접하지 못하는 게 안타까워 ‘핸드폰의 앱과 아이패드’를 이용한 작곡수업을 하고 있다. 작곡이란 게 천재들만 하는 듯 필요 이상으로 신성시되는 경향이 있는데 미술에 원데이 클래스가 있듯 작곡 또한 충분히 가능하다”며 “예술로 하나 되게 하는, 결속력과 유대감을 주고 이야기를 나누는 공통분모로서 음악이 쓰일 수 있도록 친근하게 음악적 삶으로 초대하는 사람이고 싶다”고 말했다. 

그에게 남해란 자신의 미래이며 꿈이고, 엄마이며 품이라고 한다. 세상 좋은 수식어는 다 가져다 붙이고 싶다는 권 월 씨. 그의 고민은 ‘주거’다. 남해군에 1인 가구를 위한 청년주거정책이 나온다면 더 많은 청년들이 남해에서 예술적으로 살아갈 수 있겠다는 희망을 가져본다. 

저작권자 © 남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