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4월 19일부터 2021년 11월 3일까지 ‘남해군청, 서변마을의 장소기억 아카이빙’이라는 제목으로 헤테로토피아 최승용 대표가 장소기억을 기록했다. ‘장소와 장소기억’이라는 주제로 청사신축 편입부지 주민들의 삶의 이야기를 엮어낸 구술집이자 기억책인 셈이다. 총 24가구의 주민 인터뷰(구술 채록)와 서변동과 관련한 옛 사진, 남해군청과 관련한 옛 사진 등 다양한 기억 자료가 담긴 이 책을 읽고 인상적인 부분을 발췌, 요약해 올 한해 ‘서변동네와 남해군청’에 담긴 사연들을 추슬러 보았다. <편집자 주>

 남해읍 서변동에 자리한 남해군 청사는 1959년 7월 31일 건립되었다. 전국에서 가장 오래된 청사인 남해군 청사는 약60년간 현 위치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건물을 지속적으로 보수하고 있으나 구조적 문제가 재차 발생하고 있고 정밀안전진단 결과 D등급을 받은 상황이다. 1960년 172명의 공무원에서 2021년 660명으로 증가했다.

현 청사의 위치는 1613년 고을의 수령이 정무를 진행하던 동헌이 건립되면서 400년간 이곳을 중심으로 도심이 형성된 역사적 장소이다. 청사신축추진위원에서는 행정유관기관과 생활인프라의 이동 연계성을 고려하였고 청사를 새로운 부지로 이전했을 때의 불확실성을 수렴해 현재 청사가 위치한 서변동을 신청사 부지로 결정했다.

이에 2019년 9월 17일 남해군과 남해군의회가 공동으로 청사신축부지를 ‘현 청사 부지에서 확장하여 신축’을 결정, 발표했다. 서변동에 자리한 남해군 청사가 기존부지에서 확장 신축함에 따라 신축부지 내에 주택과 상가 그리고 남해군 청사는 철거될 예정이다. 이에 거주민들은 이주 중이며 오랫동안 살아온 삶의 터전을 옮기는 것에 대한 주민들의 장소 상실감이 발생하고 있다. 이에 신청사 부지에 포함된 서변동과 남해군청사의 장소기억을 수집-발굴-기록하는 것이 이 책(용역)의 목적이다. 시간적 범위는 1910~2020년 동안의 기억이다. 

▲서변동 장소 기억: 건축물 수 57기, 주택 44기, 영업장 35. 거주민수 91명, 평균연령 65세
 서변동은 현재 군청사가 자리한 마을로 1493년 세종 21년에 남해읍성이 축성되면서부터 도심이 형성되기 시작한 곳이다. 서변이라는 이름도 성(成)의 서문(西門)밖 마을이라 해서 서변(西邊)이라 지었다. 서변동에 자리한 남해군청사가 기존부지에서 확장 신축함에 따라 18,395㎡내에 있는 남해군청사와 길, 주택과 상가건축물이 한 번에 사라진다. 이곳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들도 이주한다. 

▲서변동 주민 기억: 우리가 사랑한 그때 그 시절

 

김순배(66) …“이상하게 포근한 그 집”
신청사 건립부지로 선정되면서 다른 집들에 비해 빨리 이주나온 사정=저도 평상시에 느낀 건데 우리 군청사가 너무 오래되고 들어가 봐도 공무원들이 업무를 할 여건이 좁아. 업무조건이 좀 열악합니다. 건물도 오래됐고 좁으니 주차도 안 되고. 그래서 어차피 해야될 과제였다. 그러니까 군에서 하는 업무를 협조를 해야 안 되겠나 한 거죠. 저도 공무원 생활해보면서 뭐 어려운 거 다 겪어봤지마는 조금 일조를 하는 게 낫지 않겠나. 새로 지어지는 군청의 모습은 민원인들 원활하게끔 지하에도 주차 시설을 했으면 참 좋겠다.

서변동 집의 기억은 =집은 작고 초라하지만 그런 게 있어. 거기 가면 그 집에 들어가면 이상하게 포근하고 집에서 나오기가 싫어요. 터가 좋아서 그런 건지 몰라도. 그런 집이 좋답니다. 밖에 있으면 집에 빨리 들어가고 싶고. 또 뭘 하면 재산에 축이 안 나. 조금이라도 늘어나면 늘어났지. 축이 안 가더라고. 그거 하나 참 좋더라. 남해군민들한테 바라는 거는 가는 사람도 붙잡지 말고 오는 사람들은 좀 따뜻하게 마음을 주자. 자꾸 인구가 줄어드는 데 외부에 나가면 남해인심 흉하다 흉본다. 우리가 외부 사람 따뜻하게 품에 안듯이 따뜻이 안아주자 그게 바람입니다.

 

이복애(86)…“군청 환경미화로 14년 4개월 근무, 28년간 거주한 이 작은 집에서 5남매 키워” 

서변마을 안 떠나시고 근처에 집을 구하셨다고=늙어갖고 다른 데 가기 싫어요. 읍에 사는 우리 딸이 지금 68세인데 그 아 5살 묵을 때 정월 달에 읍에 이사왔거든. 그 터에 산 지가 60년이라. 그 자리 산지가. 지금 집 지은 지가 올해 28년 됐는데.

남해군 신청사 짓느라 이주해야 할 수도 있다는 소식들었을 때=아이고, 나는 조건도 한 개도 안 걸었어. 나라에서 하는 걸 반대해 봐야 아무 소용도 없어. 내는 조건 한 개도 안 걸고 허라 한 대로 했어. 더 받을고 하지마. 더 안 줄긴데 뭐하러.
군청사 청소 일로 자식들을 다 키우셨네요=딸 한 개, 아들 네 개. 다섯인데 아들도 큰 거 둘은 먼저 하늘 보내버리고. 다 저 집에서 태어났지. 삼베 삶아가면서 청소일했지, 안 그럼 못 키워. 내 일했을 때 알던 사람이 과장되고 국장 돼도 인사 꼭 하고 그런다고. 높은 사람들은 (인사)하는데 얕은 사람은 안 해요. 14년을 있어도 말 안 해요. 즈그들 안 하면 내도 안하고 그렇지 뭐. 말을 따시게 하는 사람하고 정답게 하는 사람하고 그 앵간한 사람도 있고 궂은 사람도 있고 여러 사람인께. 사람은 인사성이 있어야 돼요. 

 

김윤섭(60) …“1995년 건축사무소 개업, 창문 열고 있으면 축복받는 느낌”
신청사 건립으로 이주한 분들이 거의 다 집 근처로 이사하셨더라=저는 설계를 하다 보니까 보면, 자기가 사는 집 주변이 지구상의 중심이라 생각하더라고요. 내가 남해 오기 일주일 전부터 이상한 꿈을 꿨다. 큰 강을 건너가지고 못 빠져나오는 그 꿈을 일주일간 꿨어요. 그러고 남해를 왔는데 1년만 있다 갈라했는데 지금 못 가지. (남해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은?) 집사람이 천식 끼가 있었는데 남해 와서는 감기 한 적이 없고. 그 정도로 공기는 천혜의 자연이다. 창문 열고 있으면 축복받는 느낌이다. 

청사는 좀 확장해서 크게 짓는 게 필요하다 생각하셨네요?=아이고, 지금 군청사가 무너지기 직전입니다. 저 집이. 비 오면 인터넷이 안돼요. 업무를 못해요. 잘 몰라서 그렇지. 벌써 지어야 했어요. 대한민국 최고 오래된 관사라 안합니까. 저렇게 낡은 집이 없어요. 

 

김성자(78)…“35년 금강아구찜, 안 좋았던 기억 없다”
이 자리에서 35년간 식당 하면서 가장 기뻤던 순간과 힘들었던 순간이 언제?=손님들이 많이 올 때. 그때는 비빔밥 같은 거 100그릇 200그릇 이리 시켰어. 앞 아도니스 건물이 해양예식장이었는데 뷔페가 없다 보니 우리가 결혼식 음식을 했었다. 전부 다 비빔밥. 또 (남편이 나이 마흔에 세상 떠나고) 없는 살림에 이사를 참 자주 다녔다. 근데 여기에 오래 정착한 게 일단은 문만 열면 돈이잖아요. 애들 다 키우고. 안 좋았던 기억은 없다.

 

조기언(73)…“200년 공무원 퇴직 후 지은 서변동 집…다 멍들은 사람들”
군청 공무원이기도 했고 주민보상대책위워회 위원장도 하셨는데 남해군 신청사 건립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는가=다 멍들은 거지. 군청이 좁지도 않아. 지하를 2-3층 넣어버려서 주차장하고 위에 지금 7층 계획인가 그리 될 건데. 마당 남아있는 건 조경하고 있는 건 그대로 살리고 그래도 돼. 그 주차장 넓을라고 군청 넓히는 기가. (청사부지에) 들어가니까 멍든 거 아이가. (부지에)안 들어간 사람이 좋아진 거지. 들어간 사람이 보상금이 적다 많다 하니까 그 사람들이 보기엔 돈 어느 정도 받았으면 나갈 일이지 뭐 많니 적니 그런다고 사람 심리가 대부분 그래. 실제 나가는 사람 입장이 되어봐야 아는데.

다른 주민들보다 일찍 이주하셨다=우리는 바로 말을 들은 기지. 전임 공무원 입장에서 자꾸 더 주라고 할 형편도 아이고. 첫째는 주민 보상을 좀 많이 줬으면 별 문제 없었을 거고, 내가 볼 땐 그리 많지도 않다. 물가가 상대적으로 뛰어버리니까 주위에 올라간 도시계획도로 가격하고도 차이가 난다. 또 이주대책은 주택 몇 군데 해가꼬 이주대책 새운다 한다 하지. 근데 상가도 해줘야 할 것 아닌가. 

 

조선자(80)…“서변동을 떠나기 싫은 건 아무리 구져도 내 집”
신청사 건립을 위해 제일 먼저 이주를 결심하셨다고= 비워줄 때 남 기분 좋게 비워주고 그리하자 했다. 어차피 우리 동네에서는 우리 집이 말하자면 터가 제일 적어요. 그래도 내 집이고 내 터라고 몇 번을 수리해서 내 살기는 참 좋구로 해놨는데. 즈그 아부지가(남편) 군청에 다녔으니까 본보기로. 군청 밥을 먹었는데 어찌 그라겠네. 다른 사람들은 집 비워주지 말라 하든기라. 돈도 일억도 못 나오는 돈을 갖고 서로 마음만 시끄러운 기라. 본보기로 내가 제일 스타트로 나왔네. 

서변동을 떠나기 싫은 이유는=내가 살던 토대고 내가 결혼해서 살던 집이고 우리 부모들이 사준 집이거든. 친정도 읍이지 여기서 낳아서 여기서 지냈으니까 구져도 내 집이라. 

 박진평 공공건축추진단장과 청사신축 관계자 모두는 한마음으로 뜨거운 고마움을 표했다. “서변마을 주민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더 나은 내일을 꿈꿀 기회를 얻었다. 이분들의 삶의 이야기와 더불어 남해군 청사 기억자료를 함께 모아 지역유산으로 기억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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