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기, 고향의 아우성을 소리로 빚어낸 시조시인
이처기, 고향의 아우성을 소리로 빚어낸 시조시인
  • 임종욱 인턴기자
  • 승인 2021.07.09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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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시인 이처기 선생
시조 시인 이처기 선생
경남시조문학상 시상식 때 가족과 함께(2012년)
경남시조문학상 시상식 때 가족과 함께(2012년)
창원 반송여중 교장 시절(1999년)
창원 반송여중 교장 시절(1999년)

지난달 24일 신협 3층 강당에서는 시조시인 이처기(李處基) 선생의 문학 특강이 열렸다. 팔순을 훌쩍 넘긴 노시인은 1990년에 사향(思鄕)의 마음을 알알이 담아낸 연작시조 <남해 찬가> 11수를 발표해 고향 남해의 굽이굽이 아름다운 능선과 바다내음을 정결한 언어로 표현했었다. 30년 넘게 시조 창작을 천직으로 삼아 고향의 정서와 풍경, 사람들을 그려냈다. 이에 본지에서는 이처기 선생의 문학적 삶을 여행하는 즐거운 잔치를 2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주>

교사와 시인으로 수미일관한 청춘
이처기 선생(이하 경칭 생략)은 1937년 12월 29일 설천면 고사리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찬홍 옹과 어머니 김윤악 여사 사이 차남이었다. 할아버지 이예모 선생은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남해로 가져오고 설천 남양에서 벌어졌던 만세운동에 참여한 애국지사이기도 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남해읍으로 이사를 가 남해초등학교와 남해중학교, 남해농고에서 공부했고, 부산사범대학 미술과에 입학해 졸업했다.
이처기는 1962년부터 2000년까지 38년 동안 교직에 있었다. 도내 중고등학교 교사를 지냈고, 1987년 남해 미조중학교 교감으로 부임한 뒤 창원반송여중 교장을 끝으로 퇴직했다. 미술을 전공한 학도답게 섬세하고 자상한 성품으로 학생들을 이끌어 교사로서 모범을 보였다. 부인 유정자 님 사이에 아들 둘을 두었다.  
교육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이처기는 문학 창작의 열정을 감추지 못해 습작에 몰두했다. 1983년 경남교원예능경진대회 시조부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뒤 1989년 창원시조문학회 창립회원으로, 경남 시조의 줄기를 든든히 다지는 데 전념했다. 1989년 『현대시조』 신인상을 수상하고, 1990년 『시조문학』에서 추천 완료되어 등단했다.
이처기는 시조 창작을 하늘이 준 소임으로 알아, 첫 시조집 『널문리 가는 길』(1993년) 이후 『평양면옥』(1998년), 『화진포 연가』(2004년), 『장엄한 절정』(2009년), 『하늘채 문간채』(2016년)를 발간했고, 2019년에는 ‘우리시대 현대시조선’ 『오동나무』를 내놓았다.
하고많은 문학 장르 가운데 왜 시조를 선택했는지를 그는 이렇게 밝혔다.
“나라마다 고을마다 그 사람들의 가슴에 흐르는 내면의 원초적 소리가 있다. 그 소리가 언어를 업고 희로애락을 펼쳐간다. 그 나라마다 민족마다 응어리진 한과 정이 배인 소리가 있다. 그 소리가 언어를 싣고 장단고저를 타고 울리면 노래가 된다.”
개인부터 겨레를 하나로 엮어 올린 언어의 고갱이가 그에게는 ‘시조’로 귀결되었던 것이다.

만남과 되새김의 미학
시인 이처기는 수백 편이 넘는 자신의 작품 가운데 <그 해 여름의 6월> 연작과 <보자기> 연작, <기억을 날리다> 연작 세 편을 회심작으로 꼽았다. 이들 작품을 읽으면 시인 이처기가 지향했던 시조 세계의 얼개가 잡힌다. (지면상 일부만 싣는다)

아직은 / 전설이 아닌 / 헤어진 / 사연의 피켓
비 젖은 벽보에서 / 차마 눈을 떼지 못하고
굳어진 / 돌부처가 되어 / 별을 헤듯 서섰네.
- <그 해 여름의 6월>(3)

이 작품은 1983년 공영방송 KBS에서 방송한 ‘남북이산가족찾기’를 본 감격을 시화했다. 30년 넘게 생사조차 몰랐던 이산가족들이 방송국 광장에 모여 수만 장의 사진과 사연을 적어 붙였고, 1만 건이 넘는 상봉이 이루어졌다. 5개 월 동안 그야말로 산하는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드라마보다 다 극적인 재회를 보면서 시인의 마음도 복받쳐 올랐다. 너와 내가 아닌 ‘우리’라는 공동체의 짙은 무늬들이 나비처럼 피어올랐다. 벅찬 감동에 시인은 ‘돌부처’처럼 굳어졌다.

장롱 속에 오래 묵힌 매듭을 꺼내보면
소중히 싸 두었던 그리움이 일어나서
간절히 포장하여 둔 내력들이 풀어진다
- <보자기>(1)

유년 시절 시인의 억센 기억들을 담아놓은 보자기. 장롱 속에서 꺼내 하나하나 펼쳐보니 신산했던 시절들의 갈피가 실낱처럼 흩날린다. 마지막 끝단까지 풀어헤쳐 오방색 수실로 엮어야 하는 ‘맑은 얼굴’들. 사연들.
시인의 문학이 어디서 출발했고, 어디로 매듭질 것인지 짚어주는 작품이다. 어린아이 때 고향의 언덕을 뛰놀며 바라본 강진 바닷가. 골짜기마다 물결마다 오롯이 울리는 향토의 향기. 그리고 고향 벗들의 웃음소리, 울음소리. 이 모두를 시인은 작품 속에 녹아냈다.

잠자듯 가벼이 저 멀리 떠간다
투명하게 헹군 자락 고요히 유영하는
// 훨 훠훨 손에 잡힐 듯 / 잡히지 않는 기억
- <기억을 날리다-잠자리>(1)

이 작품은 시인의 자화상이다. 삶과 언어에 남은 얼룩과 구성진 세파에서 균형을 잡는 ‘은빛 날개’. 그물을 피해 가며 무상(無常)의 더께가 깔린 시공을 “꿈도 꾸며 물구나무도 서 가면서” 시인은 살아왔다. 그 불안한 비행이 시인은 두려운가? 청령(蜻蛉)으로 승화한 시인은 바람을 타고 얼의 고향을 향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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