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백수연 - 오래도록 건강하게
어머니의 백수연 - 오래도록 건강하게
  • 남해신문
  • 승인 2019.11.15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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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정자 심리학박사
류정자 심리학박사

입학금이 없어서 진학은 못했지만 공부를 계속하고 싶던 필자에게 남의 들일을 해주시고 품삯으로 얻어온 밥을 나누어주시며 어무이(어머니)는 “네가 여자라도 배워야한다” 하시며 무엇이든지 해보려고 애쓰는 것이 보기 좋다고 하셨다. “물건은 남이 훔쳐갈 수 있어도 속에 든 지식은 아무도 훔쳐가지 못 한다”라고 하시면서 중학교 검정고시 책을 구해주셨다. 일생동안 어머니를 통해서 유대를 만드는 인간의 능력을 살펴보게 된다. 어머니 없이는 지금 내 삶을 시작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어머니와 첫 관계를 맺음으로서 인간은 타인과 관계할 수 있는 능력을 가늠 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의 자식사랑은 자기희생을 통해서 오직 자녀를 사랑하심으로 은혜는 하늘 높이에다 비교해도, 태산이라고 말해도 충분치가 않기에 말로 다 표현하기가 어렵다고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필자인 나의 어머니도 그렇다. 엊그제 일요일 날 조촐하게 한정식 집에서 어머니의 백수연(백순 잔치)을 기념하는 날이었다. 군대를 제대하고 회사에 입사한 든든한 손자의 사회로써 어머니께, 할머니께, 서울과 지방에서 달려온 자손들이 차례로 큰절을 올리면서 경하 드리는 날이었다. 집안 여기, 저기에 소장되어있던 어머니의 중요한 사진들을 미리모아서 영상 애니메이션을 전공한 손녀가 만든 영상을 감상하면서 한평생 어머니(할머니)의 은혜에 감사드렸다.

자손들의 가슴에 뭉클한 생각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면서 감회가 새롭다. 어머니를 비롯하여 우리 형제, 자매들도 모두 눈시울이 촉촉하게 젖는 것을 서로가 눈치 채지 않게 찍어내는 모습을 잠깐 볼 수 있었다. 백수연을 맞으신 어머님의 만수무강을 위해 사위의 건배제의에 다 같이 “사랑 합니다!”를 외치면서 건~배를 하였다. 축배에 연이어 자손들의 인사를 받으신 후에 어머님께서 답사를 하셨다. 정확한 발음으로 멀리서 걸음해준 자손들에게 감사하다며 인사를 하신다.

2부 여흥 시간에 외아들 내외도 어머니의 만수무강에 대한 감사인사와 꽃다발을 드렸다. 증손자, 손녀들의 축하노래와 재롱도 받으셨다. 이어서 어머니께서도 흐뭇해하시면서 감사하다는 답례로 한산 섬~ 시창을 들려주셨다. 건강하게 잘 살아주신 어머니생각을 하면 가슴이 따뜻해진다. 지금까지 어머님을 잘 모셔온 남동생과 올케에게도 감사한 마음이 전해진다.

어무이(어머니) 생각만 해도 감사지수 100이다. 어머니께서는 그동안 한 많고 고생스러운 일을 수없이 겪으면서도 언제나 우리가족을 지켜주셨다. 아버지의 오랜 병환으로 가산이 기울고 입에 풀칠하기에도 어려운 지경에서 어머니께서는 약초를 캐러 들로, 산으로 다니기도 하셨다. 그런 상황에서도 자식들 배 굶기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닥치는 대로 남의 들일을 하거나 삯바느질을 하시다가 이발관을 차려서 여자아이들 머리도 잘라주면서 길쌈도 하셨다. 농번기에는 농가에 반찬고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생각하고 여객선이 집 앞에 닿는 것을 기회로 해서 가까운 여수로 건너가서 생선을 받아와서 커다란 대야에 담아서 머리에 이고 이 마을, 저 마을로 늦은 밤까지 팔러 다니셨다. 농가에서 생선을 미리 부탁받거나 조금 더 많이 받아오게 되는 날에는 동네어귀에 있는 정자나무아래에 생선을 덜어서 필자에게 맡겨두고 덜어 가신 생선을 팔고 오시면 다시 맡겨둔 생선을 팔러 가져가실 즈음에는 이미 날은 어두워져 있었다. 몸이 아픈 사람이 있거나, 어른을 모시는 댁에는 생선을 더 얹어드리고, 장사라는 건 손해 볼 때도 있고 남을 때도 있고 그런 거라고 하신다. 전기도 없는 시절에 언덕길이거나 돌밭 길에다 울퉁불퉁, 꼬부랑꼬부랑 해서 자칫 발을 헛디디게 되면 머리에 이고 있던 생선은 저만치 뒹굴고 사람은 넘어지고 다치기 일쑤였다. 필자가 국민(초등)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제일 힘든 시기에 옥수수가루를 배급 받아와서 묽게 풀대죽을 쑤어서 하루에 두 끼 정도로 연명하였다. 식구가 많으니 타온 배급은 금방 바닥나고 주린 배가 해결되지 않아서 바다의 해초(주칭이)나 들에서 캔 나물로 끼니를 해결하던 시기에 우리 형제는 학교에 도시락을 가져 가본 적이 거의 없었다. 학교에 내는 월사금(회비)을 내지 못해서 전교생 조례시간에 창피를 당한일도 여러 번 있었다. 물론 수학여행도 가지 못하였지만 어무이(어머니) 일을 도우고 싶었다. 이럴 때, 박상(뻥튀기)기계로 나를 튀겨서 키울 수만 있으면 어머니를 더 많이 도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던 한조각의 기억이 지금도 안쓰럽게 올라온다. 그런데, 벌써 백수연이라니! 지금까지 오뚜기 정신으로 살아 내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신 어머니…오래도록 건강하게 저희 곁에 계셔주시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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