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지축산 들머리에 귀여운 아기돼지 캐릭터와 영지축산이라는 로고가 산뜻하게 서 있다. 그것을 보면서 몇 걸음 더 옮기면 오른편에 미생물(EMU)배양실과 사무실이 자리 잡고 있다. 배양실에서는 짐작했던 칙칙한 냄새는 없고 술 익는 냄새만 구수하여 더욱 코를 흠흠 거렸다. 미생물이 배양되면서 나는 냄새에 사람도 이렇게 끌리는데 돼지들은 오죽할까 하는 마음에, 이것의 비밀을 빨리 알고 싶었다.

사무실 벽면에는 까만 글씨로 “미생물을 만나 행복한 돼지, 행복한 돼지가 주는 맛있는 돼지고기”라고 적혀 있고 아래에는 “청정 남해의 바다와 바람으로 키워낸 금천 해풍돈, 눈을 뗄 수 없는 선명한 육색, 코끝을 간질이는 고소한 육향, 입 안 가득 느껴지는 담백한 육즙’이라는 글귀 밑에 금천미트라는 빨간 인장이 찍혀 있다. 그리고 금천 해풍돈 제품문의 1588-8953이라는 안내 글도 빠짐없이 돼 있다. 
최 회장은 현재 세 곳의 사업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고성군 송산면 안곡축산에서 2000두를 아내가, 남해읍 외금 남해축산에서 2,500두와, 봉곡농장인 이곳 영지축산에서 3000두를 둘째아들 최경재 사장이 관리하였고 최 회장은 이것들을 총괄적으로 경영해오고 있었다. 하지만 아주 오래전 매미 태풍 때 영지돈사가 침수되어 모돈 80두를 잃는 일이 발생했다. 새끼공장인 어미돼지가 죽으니 모든 걸 잃은 것 같은 절망감이 무척 컸다. 하지만 다행히도 화재보험에 가입이 돼 있었기에 80두의 보험금을 받아 후보돈 130두를 살 수 있었다. 그 당시 양돈사가 많이 어려웠던 시기였고 후보돈 가격도 많이 내려 있었기에 싼값에 그만큼을 살 수 있었다. 운이 없어 태풍을 만났지만 이 일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여기 돈사까지 확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37년 전 전국에 양돈기술자들이 서울에 모이게 되었다. 그때 그는 제일 젊은 20대의 나이여서 패기도 넘쳤고 꿈도 많았기에 그곳에서 아주 큰 다짐을 했었다. ‘30년 후에는 돼지농장을 꼭 가질 것이라고,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농장을 가질 것이라고’. 그런 다짐을 잊지 않아서인지 매미 태풍이 왔을 때 조금도 좌절하지 않았고 위기가 기회라는 생각으로 이겨내었다. 식지 않는 열정이 언제나 잠재되어 있었기에 언젠가는 꼭 잘 될 것이라는 믿음도 항상 따라 다녔다. 2010년 말부터 2011년 3월말까지 전국에 구제역파동이 왔지만 그의 김해농장은 다행히 비켜갔다. 자연적으로 돼지 값이 폭등하게 되었고 회장님은 많은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화재예방을 위한 배선 공사를 했지만 공사불찰로 인해 부분적으로 시공했던 사업장이 2~3개월 후 화재로 소실되고 말았다. 구제역 때 번 돈을 화재 복구비용으로 모두 지출해야만 했다. 웬만한 사람은 상심하여 쓰러지겠지만 이것 또한 회장님을 무너뜨리지 못했고 그의 다짐은 여전히 변함없었다. 다른 농장에서 난 불까지 모두 세 번의 화마가 있었지만 꿋꿋이 견뎌냈다. 
그런 일이 있고 5년 후, 미생물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농장에서 나는 냄새를 줄이고, 건강한 돼지를 키우고, 맛있는 고기를 만드는 것은 미생물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유럽연수원을 갈 일이 있었는데 그곳은 시설도 안 좋고 규모도 작았지만 냄새가 없었다. 그 이유가 토착미생물을 활용하는 농장 경영 방식 때문임을 알고 그때부터 관심을 가지고 미생물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2015년 7월부터는 미생물을 통한 발효사료, 2015년 11월부터는 발효기계를 구입하여 본격적으로 발효사료를 만들었다. 2016년 11월부터 미생물을 첨가하여 기른 돼지를 작년 2월부터 고성에 있는 육가공회사에 공급하여 고성축협에 납품을 하게 되었다. 육즙도 많고 맛도 부드럽다는 반응으로 인해 독점을 하다시피 했다. 7월에는 ‘해풍한돈’으로 출발했지만 더 높은 가격으로 팔 수 있는 회사를 찾다보니 금천미트라는 유통회사를 만나게 되어 8월부터 금천미트에 정상적으로 물량을 공급하면서 해풍돈으로 이름이 바뀐 것이다. 해풍돈은 청정한 바닷바람을 먹고 자란 돼지라는 뜻이다. 
그가 20대에 돼지를 키운 이유는 어렸을 때 집집마다 돼지를 키우던 시절이었고 어머니가정미소를 했던 관계로 어느 집보다 더 많은 돼지를 기를 수 있었다. 10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4남1녀 중 둘째였던 그는 중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방아 찧는 일을 했다. 공부만 열심히 하고 싶었지만 가정환경이 가로막아 배움에 대한 갈급함이 항상 남아있었다. 그런 절망감을 느끼고 있던 어느 날 새마을운동 화보를 접하게 되면서 미래의 청사진을 원대하게 그릴 수 있었다. 그 책에는 농촌에서도 열심히 만하면 큰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믿음과 용기를 심어주는 양서였다. 그것을 통해 자극을 받은 최 회장은 융자를 받아 3000평의 시설원예를 시도했다. 5년 동안 발버둥 치며 최선을 다했지만 기술의 한계를 느껴야했다. 자신만 잘하면 잘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은 마음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시 시작한 것이 한우 200두를 키우는 일이었다. 아무리 열심히 배우고 열정적으로 했는데도 사육하는 기술에는 미치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소를 처분하고 모돈 100두와 비육돈 50두를 사서 양돈업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는 후보돈(종자돈)이 없었기에 비싸게 살 수밖에 없었다. 본격적으로 돼지를 키운 것은 30대였다. 원예 5년, 소 키우기 3년을 했으니 정확하게 32세부터였다. 본격적인 축산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양돈기술교육도 5년 정도 더 받았다. 
작년 4월에 확실히 생각한 것은 좋은 육질의 맛있는 고기는 좋은 환경에서 자란 돼지에게서만 나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배합사료에 발효사료를 첨가하여 키운 돼지는 분변에 대한 냄새가 거의 없었다. 돼지들은 좋은 환경에서 좋은 발효사료를 먹고 자랐기에 병도 걸리지 않고 잘 컸다. 미생물이 농장의 효자라는 말을 부정할 수 없는 증거였다. 현재 세 군데의 돈사는 2000여 평이고 대지는 15,000여 평이며 1년에 12,000두를 출하하고 있다. 오는 2월 정도에 지금의 세 배나 되는 전자동시스템화 시설을 갖춘 돈사를 고성에 지을 예정이라고 한다. 최 회장은 이 가업을 두 아들이 이어주길 바라며 그런 준비를 빈틈없이 하고 계셨다. 
“그동안 운도 좋았고 지역사회에서 도움도 많이 받았기에 지금껏 베풀며 살았다. 앞으로도 가능하면 그렇게 하며 살고 싶다”라고 했다. 그의 경영이념은 이익이 생기면 반드시 직원과 나눠야한다는 것이었는데 그것을 실천하고 있음을 조금 전에 만난 직원들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다. 전국에서 최고의 돈사를 꿈꾸는 최 회장은 아침에 눈만 뜨면 사업장으로 달려가 쾌적한 축사에서 가장 만족스런 백만 불짜리 미소를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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