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은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남한을 침입하여 전쟁을 일으킨 비극의 서막일이다. 이 남침전쟁을 북한은 남조선이 북조선을 침입한 전쟁이라고 역설(逆說) 했다. 심지어 남한에 거주하고 있는 북한 동조세력들까지도 북한의 그 선동설을 믿고 동조했다. 그러나 소련연방이 해체되고, 한?러국교가 수교하자, 6.25남침은 스탈린과 김일성의 공동작품인 것을 소련정부의 문서에서 입증되었다.
해방 직후 5년간 소련의 군수품(탱크, 장갑차, 곡사포 등) 지원으로 북한 병력 7만여명이 무장하자, 북한은 전차도 대포도 없는 3만 4천명의 남한 병력을 얍잡아 휴가와 외출의 휴일인 25일을 택해 기습 남침했다. 이후 전세가 불리해지자 모택동 군이 가세하여 한반도에 수십만명의 살상과 굶주림, 파괴 등 비참한 전쟁을 3년간 치른 것이다. 결과는 침략전쟁은 성공할 수 없다는 교훈을 UN의 법과 참전에 의해서 보여준 전쟁이었다.
 지금도 북한이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여건을 갖출 때 북의 전쟁도발을 예상해야 한다. 그 예상의 핵심은 북한과 남한의 변화적 특징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북한의 전쟁도발의 특징은 자체 군사력이 남한 군사력보다 우위에 있다고 확신할 때, 남한사회에 북한체제를 동조하는 세력이 견고해 있을 때, 남한 사회에 폭동, 반란, 대정부투쟁 등의 사회혼란 조성세력이 형성되어 강해질 때, 북한을 지지하는 강한 외국(예로서 중국이나 러시아)과 동맹관계를 형성했을 때, 남한을 지지하는 강한 국가(예로서 미국)와 동맹관계가 없거나, 취약할 때 등으로 본다. 지금의 북한의 강한 무기는 핵과 미사일, 잠수함 등의 남한에 없는 무기 또는 질적 및 양적 우수한 것을 갖추고 있다고 보아진다. 다만 경제력과 인구가 남한보다 열세하고, 미군의 우수한 무기 때문에 전쟁을 도발해도 장기전으로서는 실패한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북한은 남한 당국과 상대해서 대화하려 하지 아니하고, 남한을 지원하고 있는 미국을 상대해서 미국이 남한과 동맹관계 폐기나, 미군의 남한 철수 등을 고집하고 있다. 따라서 남한국민은 6.25남침 이전의 남한사회 상태를 기억하고, 교훈 삼아야 한다.
 첫째 사건은 1948년 4월에 일어난 제주도 4·3폭동 사건이다. 해방 후 제주도 민중, 일본군 출신, 군속, 징용 노무자, 중국에서 귀국한 의용군, 팔로군 등 전투 경험자가 많았고, 이들 중에는 남로당원이 되어 제주도 인민해방군을 조직했다. 이들은 일본군이 남긴 무기로 무장하고, 도민을 그 조직에 가입시켜 약 1,500명에 이르렀다. 이들의 목적은 제주도를 공산사회로 만드는데 있었고 이 세력과 대항하는 서북청년단체와 경찰관에게 자주 충돌하였다. 5월 10일에 있을 총선을 무산시키기 위해서 4월 3일 새벽 2시에 무장하여 폭동을 일으킨 것이 4·3사건이다. 그 이후 9연대 내의 공산사상을 가진 문상길중위, 오일균소령등이 남로당과 은밀히 계획하여 연대장 암살과 경찰력 타도에 주력하였다. 남해출신 박진경 대령이 암살당한 후, 육. 해. 공군이 합동으로 군 내외의 폭동세력을 적극적으로 토벌하여 1950년 6월쯤 거의 종료시켰다. 이런 비극은 제주도의 한라산, 일본군무기, 육지에서 멀리떨어져 있는 섬이었기 때문에 공산세력은 이를 이용한 사건인 것이다.
 둘째 사건은 1948년 10월 19일에 발생한 여?순반란사건이다. 여수주둔 14연대 내의 중대장 김지회중위, 연대본부 인사담당 지창수상사, 순천파견 선임중대장 홍순석 중위 등이 남로 당과 합동하여 일으킨 반란사건이다. 이들은 연대본부 내 약 40명을 사전에 포섭하고, 반란계획을 세워 무기고와 탄약고를 사전에 점유하였다. 10월 19일 밤 8시에 14연대의 1개 대대 병력이 제주도 토벌작전에 출전할 기회를 이용하여, 밤 8시에 반란을 일으켰다. 출동 대대가 집합한 연병장에 지창수상사는 “동족끼리 싸우는 제주도 출동은 반대한다. 경찰이 우리한테 쳐들어온다, 경찰을 타도하자, 우리는 조국의 염원인 남북통일을 원한다. 지금 북조선 인민군이 남조선 해방을 위하여 38선을 넘어 남진하고 있다. 우리는 북상하는 인민 해방군으로서 행동한다.” 등 거짓선동을 하자, 이를 반대한 하사관 3명을 즉석에서 사살하고, “미 제국주의 앞잡이 장교들을 모조리 죽여라”하면서 장교들을 먼저 사살하여 부대 통솔 장교들을 없앤 것이다. 육사 2기 대대장 3명과 3기~6기생까지 20여 명의 장교가 현장에서 사살당했다. 사병들은 영문도 모르고 그 대세에 휩쓸려 반란자 약 3천 명에 이르렀다. 지상사 지휘에 따라 여수와 순천의 좌익단체와 학생단체 등 600여명이 합세하여 경찰관, 우익단체, 학생연맹, 기관장, 유지, 종교인 등을 체포하고, 인민재판 형식을 거쳐, 이들을 총살, 타살 등 약 400여명을 살상시켰다. 그 이후 이들 반란군은 국군의 반격작전에 밀려 지리산으로 후퇴하면서 장기 유격전을 하였고, 1950년 6월에 반란을 종결시켰다. 이런 비극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남한 국민은 지혜로워야 하고 항상 경계하며 대비해 있어야 이런 비극을 예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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