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해시장 덕신옷수선점 사장 정선자 씨
대로변과 가까운 남해시장의 영농후계자 직매장 뒤편 ‘덕신옷수선.’ 이곳 사장님 정선자 씨(57)는 출근 전 대문을 나서며 남편 무덤을 향해 “나, 가요”라고 인사를 한다고 했다.

남편은 20년 전부터 간경화였다. 간경화가 간경변증으로 발전하고 레이저 시술만 8회, 남편은 병에 쓰러졌고 약에 취해 쓰러졌다. 남편은 오래 아팠다. 88년도에 나아졌다가 92년 재발, 2004년부터 악화됐다. 지난 8월2일 남해병원에서 숨졌다.

사별 1년 전, 정 씨는 병든 남편을 집안에 두고 행여 문제가 생길까 두려워 방문까지 잠그고 출근했다. 미싱에 옷을 밀어 넣을 때, 꼼꼼한 바느질로 소문이 났지만 바늘 한 땀에 그냥 눈물이 흘러나오던 시절이었다.
“마지막이 가까웠다는 느낌이 오더라고요…….”

그날, 남편 생각에 당최 좌불안석이었던 시간,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을 때 갑갑함을 이기지 못했던지 남편은 부엌 마당에 미끄러져 쓰러져 있었다. 보다 못한 정 씨는 남편을 업고 다음날부터 시장 점포로 출근했다. 40kg밖에 나가지 않던 남편은 그리 가벼웠다. 이렇게 남편과 같이한 1년, 장선자 씨의 1년은 “남편의 눈빛만으로도...”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아는 사람이니까. 단골들이니까. 손님들이 편하게 봐 줬어요.”
그런 정(情)을 느끼며 부대끼고 눈 마주치고 살던 시장사람들과 이웃이 있었다.
중매로 맺어진 남편은 당시엔 청원경찰이었다. “제 나이 30 들면서 시집왔어요. 훤칠하니 잘생겼고.....돈도 잘 벌었고......지금은 못해준 게…….”

인터뷰 당시, 계를 한다고 계꾼들이 정 씨의 점포에 모여 한창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못해준 게....”란 말 뒤 필사적으로 눈물을 감추려던 정 씨는 결국 눈물을 뚝뚝 흘리고 말았다.

“설천면 덕신마을에 우리 집이 있어요. 우리 시숙이 남편 무덤을 집에서 고개만 돌리면 보이는 곳에 만들었어요.” “집을 나갈 땐, 나, 가요”하고 남편 무덤을 향해 말하고 “오면, 나, 오요”하고 인사한다고 했다.
부산에 있는 정 씨의 딸 둘은 정 씨의 말대로 “그런 딸이 없습니다”란 말처럼, 주말마다 아버지 간호를 위해 남해로 왔다. 대소변 수발을 엄마를 대신하거나 엄마를 쉬게 했다고 했다. 주위 사람들은 “그 딸 효녀제”라며 맞받아줬고, “맛있는 거 사먹어라”며 정 씨의 형편을 알고 푼돈을 주머니에 쑥쑥 집어넣곤 했던 사람들이었다.

점포는 남편이 조금 나아졌을 때 공사장에서 돈을 벌어 사준 ‘마지막 선물’이었다.
정 씨는 호흡이 거칠고 몸이 썩 좋질 않다. 남편 병구완 때문에 병원의자에서 너무 오래, 자주 잠을 잤기 때문이라 했다.

‘이혼 생각은 하지 않았나’는 질문에 정 씨는 “우리 딸이 상처를 받을까봐”란 말을 했다. “남편이 불쌍했지요”란 말을 ‘사랑했기 때문’의 대신으로 하는 말 같았다. 정 씨의 지갑엔 속옷차림의 젊은 남편이 아내를 향해 웃고 있다.

남해병원에 있을 때 앉으나 서나 남편에게 그렇게 많이 ‘뽀뽀’를 했다는 정 씨다. 그때마다 남편의 표정이 무척 좋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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