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을 열어라
‘동동 동대문을 열어라 남남 남대문을 열어라 열두시가 되면은 문을 닫는다.’ 어릴 적 기억속의 동대문은 시간이 되면 문을 열고 닫는 커다란 대문인줄 알았다.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상상속의 동대문은 국민 학교 교과서에서 처음 만나 한양도성에 있는 4대문의 하나인 것을 배우고 그 모습을 사진으로 보았지만 시골에 살다 보면 가볼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다.
지금은 교통이 발달하여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가 볼 수 있는 장소가 되었지만 서울에 살면서도 볼일이 없으면 일 년에 한 번 가기도 어렵다. 하지만 워킹 클럽에서는 거의 매주 대화에 오르는 곳이 동대문이며 한 달에 한두 번은 동대문 주변을 돌아보고 맛집에서 점심을 먹는 것은 나이 들어 복 받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동대문은 조선 태조 이성계가 한양도성을 축성할 때 동서남북에 도성을 출입하는 큰 문을 내고 유교사상인 ‘인의예지신’을 각 대문에 붙였다. 동대문은 흥인문(興仁門), 서대문은 돈의문(敦義門), 남대문은 숭례문(崇禮門), 북대문은 지(智)자가 들어가야 하는데 숙정문(肅靖門)이다. 북대문은 사대문 중 유일하게 산 위에 있는 문으로 항상 문을 닫고 있었으며 지혜는 과시하는 게 아니라 드러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처음에는 맑을 청(淸)자 숙청문(肅淸門)이라고 불렀다가 조선 후기에 편안할 정(靖)자 숙정문으로 이름을 바꿨으며, 도성 중앙에 세운 종각은 보신각(普信閣)으로 하였다. 동대문은 지대가 낮은 곳에 있어 외적의 방비에 취약한 점을 보완하기 위해 옹성을 쌓은 것이 특징이며, 이름도 네 자가 된 것은 지역 특성을 고려하여 지자를 넣은 것이라고 하며 지금의 건물은 고종 때 중수한 것이라고 한다.
낙산 도성길 입구에 있는 한양도성 박물관은 규모도 크지 않고 전시물도 많지 않지만 도성의 건설, 관리 역사와 훼손과 복원의 과정을 알 수 있게 정리한 박물관으로 2-3층이 전시실이다. 전시된 내용을 요약해 보면 1396년에 축조된 한양도성은 오랜 기간 수도를 지켜온 성곽이다. 지형지물을 이용한 도성은 근대화 과정에서 훼손된 부분이 있지만 비교적 원형이 잘 남아있어 도시와 공존하는 문화유산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수도방위를 목적으로 한 도성의 길이는 18.6km에 달하고 동서남북에 8개의 성문과 2개의 수문이 있었다. 백성들은 성문이 열리고 닫히는 시간에 따라 생활을 하였으며 수도권과 지방을 나누는 경계이기도 하였다.
일제가 나라를 강탈한 후부터 성벽처리위원회를 설치하여 근대화와 도시정비를 명분으로 1908년부터 성문과 성벽을 파괴하여 신궁과 운동장, 대규모 주택지가 들어서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서쪽에 있는 돈의문은 철거하면서 부재를 경매에 붙여 205원에 팔았다고 하며 소의문도 교통에 방해가 된다 하여 철거하였다니 도성의 역사도 근대화 과정에서 많은 수난을 겪은 것을 알 수가 있다.
동대문 주변은 근대사에서 변화가 많은 곳 중에 하나이다. 선교재단에서 세운 릴리언헤리스병원은 이대병원으로 운영하다 문을 닫았고, 서울에 전차를 운영한 발전소와 전차로선은 1968년까지 운영, 여러 회사가 공동으로 운영하던 고속버스터미널은 1973년에 반포로 옮겨간 주차장에는 호텔이 들어서고 복개공사를 한 곳에는 동대문 종합상가가 들어섰다. 동대문 운동장은 일제 강점기에 조선시대 훈련원과 도성 성벽을 허문 자리에 1925년에 일본 황태자 결혼 기념사업으로 경성운동장을 만들었다. 국가 주도 큰 행사나 경기를 치렀으며 고교야구의 전성기를 통해 잘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운동장을 철거하고 동대문 역사문화 공원으로 세계 패션의 중심지가 되었지만 지금은 공실이 늘어나고 외국의 관광객이 다녀가는 곳이 되고 있으나 앞으로 또 어떤 변화가 있을지 알 수가 없다.
동대문 지역은 도성을 중심으로 성안과 성 밖이 큰 차이를 보이는 곳으로 성 밖의 창신동은 시골 사람들이 처음 서울에 올라와 자리를 집은 곳 중에 한 곳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기반으로 사업을 하고 친지들을 불러와 지역사회의 중추 역할을 하였다. 창신동은 지금도 서울의 달동네 중에 하나로 개발이 더딘 곳이지만 드라마를 촬영하거나 60년대의 도시를 보기 위해서 찾아가는 곳이다. 일제가 조선 총독부와 경성역을 짓기 위해 석재를 캐어내고 남은 절벽에 집 없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형성된 마을은 지금도 절벽마을로 남아있어 그 시절의 애환을 느껴볼 수 있다. 또 동대문 시장과 가까운 지역 특성으로 수많은 봉제 공장이 있어 시골에서 올라온 젊은 여성들이 돈을 벌어 시골에 동생들을 교육시킨 곳이기도 하다.
도성 길의 초입 길가에는 수크령꽃을 배경으로 하는 포토 존이 있어 우리도 인증샷을 찍는다. 큰 강아지풀처럼 생긴 수크령은 흔한 풀이지만 이름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길갱이나 기랭이라 불리는 풀로 고양이 꼬리 같은 꽃을 피운다. 한방에서는 양미초(狼尾草)라 불리는 약초로 요즘은 관상용으로 재배를 하기도 하며 결초보은(結草報恩)이라는 고사성어와 관련이 있는 풀이다.
춘추시대 진(晉)나라 대신이었던 위무자에게는 애첩이 있었다. 어느 날 병석에 눕게 된 위무자는 아들 위과를 불러 자신이 죽으면 애첩을 개가시키라고 말했다. 그런데 병이 위독해진 위무자는 자신이 죽으면 애첩도 함께 묻으라고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나게 된다. 위과는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남기신 전혀 다른 두 유언 사이에서 고민을 하다 애첩을 순장(殉葬)하는 대신 다른 곳에 시집보내면서 “난 아버지께서 맑은 정신에 남기신 말씀을 따르겠다”라고 하였다.
세월이 지난 후에 위과는 전쟁터에서 진(秦)나라 군대와 싸우게 되었는데 적장 두회(杜回)가 워낙 용맹하여 병사들이 감히 맞서지를 못했다. 위과는 전황이 불리하여 퇴각할 상황에 처했는데 어느 순간 두회가 갑자기 비틀거리더니 움직이지 못하고 고꾸라지는 바람에 위과는 쓰러진 두회를 손쉽게 사로잡아 큰 공을 세우게 되었다. 그런데 위과가 두회가 고꾸라진 자리를 자세히 살펴본즉 풀들이 매듭지어져 있는 것이었다. 그날 밤 한 노인이 위과의 꿈속에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네가 시집보낸 아이의 아버지다. 오늘 풀을 묶어 네가 보여 준 은혜에 보답한 것이다.”
어쩌면 길가에 흐드러진 풀이지만 이제는 망구가 되어 버린 끈질긴 봉제공들의 모습과 마음이 닮았다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