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항복 소식에 환호…광복군 위세 떨친 7인 동지

이동초 출신 애국지사 기록자료 [5] - 최용덕 애국지사 수기⑤

2025-05-23     김수연 기자

본지는 광복 80주년을 맞아 정봉주 전 이동초등학교 역사관 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이 발굴, 수집해온 이동초 출신 애국지사들의 미공개 기록자료를 연재한다.

연재 다섯 번째 자료는 최용덕(1920~2004) 애국지사의 수기(手記)다. 최용덕 선생은 1998년 자신의 생애를 회고하는 자서전을 작성했는데 성장 과정에 이어 학도병 징집과 탈출, 광복군 참여 후 해방을 맞기까지의 기록을 담고 있다. 아쉽게도 친필원고는 분실됐지만 장남 최영일 씨가 옮겨 친 원고가 남아 있다. 정봉주 전 위원장이 2022년 최영일 씨로부터 입수한 수기와 함께 사진·신문기사 등의 관련 자료를 본사에 보내왔다. 원문대로 싣되 가독성을 위해 단락을 나누고 소제목을 달았다.  <편집자 주>

충의구국군 정치부 전체 동지 환송 준공(李俊公 小將) 주임 기념. 1945.6. 중국 충의구국군 정치부 근무 시 기념 촬영(류재영, 『7인의 탈출』). 앞줄 우측 다섯 번째 팔짱낀 이가 최용덕 선생이다

나는 아침이면 혼자 일찍 일어나 산에 올라가서 운동하고 내려오는 습관이 있다. 이때가 8월 초가 된 것이다. 이제 나이 74세의 노령이 되어 지난날을 추시하려 하니 아득한 일이기도 하다. 8월 12일[8월 6일과 9일 원자탄 공격을 받은 일본은 8월 10일 연합국 측에 무조건 항복 의사를 전했다] 아침이었다. 저 서편쪽인 상요마을 새벽부터 큰 소리로 고향처럼 북소리, 징 소리가 울리고 마을 사람들이 총출동해서 춤을 추고 뛰는 것을 보고 곧바로 이대장에게 전하고 뛰어갔더니 나의 손을 잡으면서 일본군이 무조건 항복을 했다는 것이다. 전쟁은 종전되었다는 말이다. 나는 한동안 정신이 혼돈한다. 야만적인 그 일본이 항복하게 되었다. 종전이다. 고국을 찾아갈 수 있다. 해방이다. 가슴이 벅차다. 

나는 소리를 외치고 해방이 되었다고 대원을 보고 제일 먼저 소리 높여 외치면서 동지들과 안고 울었다. 좀 더 순간 참모부를 찾았더니 원자탄을 투하해서 일본 천황이 총을 버리고 고국으로 귀환하라는 방송을 했다고 한다. 과연 7, 8일 전에 참모총장이 종전 말을 하더니 연합국 측은 미리 원자탄 투하 계획을 서로 알고 있었다. 원자탄이 우리를 살렸다. 조국 강산은 헐벗을 대로 헐벗고 먹을 식량도 없고 근로보국대로 장병으로 정신대로 만주 간도로 이주하였고 대다수 남은 사람은 친일파 민족반역행위를 한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광복운동 항전 계획을 버리고 오직 귀국길을 찾아야 한다. 구대장(區隊長)은 빨리 배를 타고 다시 육로로 차가 있는 곳에 승차하여 분대별로 항주(杭州)에 도착, 13일 밤늦게 소주에 되돌아온 것이다. 

14일 상해에 입성하여 거류민단 조직 작성 총인구 조사 작성 중국해병대와 연락 식량 보급이 급선무였다. 그러자 나는 행정처 사무를 떠나 일본군 장교회관에 광복군 2중대 본부를 편성하여 대원 500명을 인솔하고 매일 그 식량 보급에 전담하였다. 중국 헌병대는 일본군 무장해제에 합동을 말했고, 같이 무장해제에 참가하였고 일본군은 벌판에 천막생활을 하면서 귀국 인원 교섭을 미군에 하였고 우리는 공사(公司) 건물을 빌려서 사용하면서 귀국선 교섭을 하였으나 여기에서도 사상대립으로 패전국보다 교섭이 늦어지는 추태를 가졌다. 

광복군에 입대 후 얼마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충의구국군 30명을 거느리고 일본 살상탄 앞에 성공하여 중국군은 도저히 접전할 수 없는 상태에서 승전을 계속하고 군의 사기 앙양에 크게 기여하여, 동남아지구 총사령관 고축동(顧祝同) 장군께서 해방 후 30년 되어 우리들의 공적서를 보내왔으니 당시의 전사(戰史)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중국 전선에 신문보도 되었으니 광복군의 마지막 위세를 우리 7인 동지가 마무리한 셈이다. 

최용덕 선생의 학도병 탈출 동지 류재영 애국지사가 1987년 3월 25일 자유중국 방문시 받은 공적 증서. 제목에 ‘한국 국적의 일곱 전사가 우리 군의 작전에 협조한 영용한 사적(韓籍七戰士協助我軍作戰英勇事積)’이라고 적혀 있다(출처: 『7인의 탈출』).

“조상의 가호와 부인의 기도에 감사”

제국주의 독재정권 시대의 당시 일본은 공연히 남의 나라를 욕심내고 우리나라와 중국을 침략한 셈이다. 중국 비전투인인 민간인의 실상은 말할 수 없이 참혹하고 민가의 소각은 둘도 없는 만행이어서 그의 전쟁배상은 일본국토를 다 바쳐도 모자랄 것이다. 중국은 폐허가 된 조국 건설, 근대화에 여념이 없고 오히려 일본군의 선진된 힘을 배워서 먼저 조국의 국력을 증강하는 데 매진하는 것이니 훌륭한 덩샤오핑 국가주석 지도자이시다. 

독일, 이태리, 일본 3국이 침략 국가였고 여기에 대전하는 미, 영, 불, 소가 2차대전에서 원자탄으로써 승리하고, 이때 소련과 미국이 38선을 두고 우리나라는 완전히 완전 독립을 못 하게 되고 말았다. 일본은 우리나라를 완전히 말살해 버리는 정책이었다. 학생과 젊은이는 대륙전선으로 몰아내고 유지(有志)들을 암살하고 농민들은 만주로 강제 추방하고 글자와 우리말을 못 쓰게 하고, 성명을 일본인 식으로 개성(창씨개명)하였으니 종전이 늦었으면 이 나라 이 국토에는 왜색 일변이 될 것이 불 보듯이 분명하였다. 

그러기에 일학년부터 대학까지 일본역사 교육과 일본말을 배워서 우리는 완전하게 일본 교육 속에서 성장했지만, 목숨을 내던지고 조국을 찾으려 한 것이 조국광복운동이었다. 무서운 대포와 기관총, 현대전 속에서 조국광복에 신명을 바쳐야 한다는 일념(一念)은 광복 선열에 비하여 부끄러움이 없다고 자부한다. 여기에는 나의 힘이 아닌 조상(할아버지)의 가호와 날마다 정화수에 살아서 귀환하라는 부인의 기도에 너무도 감사한다. 인생에 평생의 행운 개척이나 독고가 아닌 옆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 부모님의 영혼에 감사하고 천지신명에 감사합니다. 

조국의 번영 바라며 70세에 수기 집필

이제 고희의 노령에 이르러 이날까지 미루어 왔던 지난날 애국심을 불태우고 용감하게 광복군 대열에서 싸워봤고 남은 일은 부모님 묘소에 비(碑)를 세워 가꾸고 자손들 뒤이어 애국애족의 마음이 선행되어서 효손(孝孫) 되기만 바란다. 

2차세계대전에 갈 적에는 살아서 돌아올 수 없었고 일본의 정책 역시 용서가 없었다. 이때 결혼한 지 3개월이 안 된 처군(妻君)은 하루도 빠짐없이 정화수 떠놓고 살아오기만을 기원하였다. 시가(媤家)나 친정에서 재혼하라고 권하는 환경 속에서 일편단심 변함이 없었으니 그의 정성이 통천(通天)한 것이다. 그러자 이어서 시부모님 두 분의 노병환(老病患)으로 20년간을 채변을 계속하였으니 그 정성 또한 효부(孝婦)라 부르겠다. 말이 쉬운 일이다. 어찌 책임을 수행했는가 말이다. 같이 살아가면서 지켜본 이 사람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방에 게시된 삼동노인회 상장에도 쓰여 있으니 효부비(孝婦碑)를 세우고 동네 사람들에게 표하고 싶다.

나는 일본에서 공부도 고학도 박대도 받아 보았다. 대륙전선에 맹호처럼 사선(死線)도 달려보았고 해방 후 국제도시 상해 생활 9개월 동안 외국인과의 표정도 가져보았으나 한 사람의 악정(惡情)이 그때그때 나라의 명예를 말했으니 개인 사회생활에도 그러하지만 좀 더 여유가 있고 인의예지가 원만해서 인상이 아름다움이 가까운 애국의 길임을 느꼈다. 일본이 침략의 극악성을 했지만, 영원히 원수가 될 수 없었고 희망찬 조국의 영원한 번영에 분발하기를 바란다. 

1998. 08

건국 50주년 무더운 여름날

영지 자택에서 최 용 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