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림단 조직 항일운동…진주·남해 어업권 확보에도 총력
이동초 출신 애국지사 기록자료 [1] - 하전 이상태 ‘공적서’②
본지는 광복 80주년을 맞아 정봉주 前 이동초등학교 역사관 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이 발굴, 수집해온 이동초 출신 애국지사들의 미공개 기록자료를 연재한다. 지난호에 이어 하전 이상태 선생의 보훈부 공적서 기록을 게재한다. 이번호에 소개하는 공적서 내용에 따르면, 이상태 선생은 3.1운동 직후 유림단을 조직해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하였고, 옥고를 치른 후 진주와 남해를 거점으로 일제에 빼앗긴 어업권 확보와 어민보호에 앞장섰다. 정봉주 전 위원장의 도움으로 공적서 원문의 한자를 한글로 바꿔 게재한다. <편집자 주>
공적서(功績書)
경남 남해군 삼동면 지족리 105번지
애국지사 하전(河荃) 이상태(李相兌)
1891.09.17.~1955.12.24.
3. 이상태는 남해 탈출 후 진주에 거처를 정하였는데 유년시 진주 봉래서당(逢來書堂) 유학 동지들의 도움이 컸다. 그의 항일 독립운동은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되었으니 남해 탈출 직후부터 활동을 개시하고 동지들을 규합하여, 1919년 4월 15일 진주군 진주면 평안동 86번지 자기 방에서 (영남) 유림단(儒林團)을 조직하니 단원은 무려 50명에 이르고 단장에 추대되니 명실공히 영남 유림 독립지사들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이상태는 유림단을 조직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1919년 9월에 조직된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에 참가함으로써 그의 독립운동의 활동영역을 전국적으로 넓혔을 뿐만 아니라, 상해 임시정부와도 비밀 접속을 갖고 남해, 진주 유지들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여 임시정부에 송금하였다. 이 독립운동 자금 모금에 있어서 남해의 거부 김주석과 윤도천(애국지사, 3선 국회의원 윤병호의 친형) 두 지사의 적극적인 호응에 크게 힘입었다 한다. 그리고 그의 모금 활동은 지속적으로 계속되었다. 그러나 국내 활동에는 여건의 한계를 느끼고 보다 결정적인 독립운동을 완수키 위해서는 임시정부와 합류 해외에서 활동하는 것이 첩경임을 절감하고 실질적 해외망명 길에 나섰다.
4. 이상태는 1920년 4월 임시정부로 가는 도중 서울에서 일경에게 피검되어 종로경찰서에 구금되었으며, 당시 보안주임(과장?) 이원보(李元甫)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종로경찰서를 탈출할 수 있었다. 이원보(전북지사 역임)의 회고에 의하면 이상태가 서울에서 체포된 것은 상해와 인천을 왕래하는 화물선에서 모 독립지사의 소지품에서 이상태에 대한 임시정부의 발령장(직책미상)이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한다.
5. 종로경찰서를 위기일발로 탈출한 이상태는 행상을 가장하여 전국 각지를 전전 독립운동을 계속하면서 다시 독립자금을 모금하여 임시정부에 송금하고, 1921년 11월 김종명(金鍾鳴), 김인섭(金寅燮) 동지들과 함께 상해에 망명코저 인천에서 상해행 선편을 기다리다가 동년 11월 15일 인천부(仁川府) 용강정(龍岡町) 인해여관(仁海旅館)에서 급거 출동한 일경에게 피검되었다. 피검시 이상태는 독립자금 제공자 명단을 신속히 입속에 삼킴으로써 많은 동지들의 고초를 면케 할 수 있었다.
인천경찰서에서 온갖 가혹한 고문이 자행되는 심문이 3개월여나 계속된 끝에 겨우 조사가 끝났는데, 고문 중에서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대침으로 손톱, 발톱 사이를 수없이 계속 쑤시는 것이었다고 이상태는 후일 모 인사에게 실토한 일이 있었다 한다.
익년 2월 28일 해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이 선고되었고, 동년 6월 17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일심 형량이 확정되어 평양형무소에서 복역하고 1923년 7월 25일 출옥하였다.
6. 이러한 엄청난 고초를 겪고도 이상태는 추호의 동요나 주저도 없이 강인한 의지로 다시 독립운동을 계속하였으니, 이는 잔인무도한 일제의 단근질도 워낙 청직(淸直), 강의(剛毅), 총혜(總慧)한 그의 천성에는 미지근하였거나, 또는 불에 기름을 붓듯이 그의 애국충절을 더욱 자극한 탓이었으리라. 다시 전국 각지를 전전하면서 동지들의 규합과 독립자금 모금에 심혈을 기울이기를 4년여의 세월을 소비하고 다시 진주에 낙향하였다.
그가 진주로 돌아오자 유림 독립 동지들과 독립자금을 출연(出捐)했던 동지들은 그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그의 그간의 노고를 격려하고 고초를 위로하였다. 특히 독립자금 제공자 명단을 입속에 삼킨 기지와 그 혹독한 고문을 감내하여 많은 동지들을 보호해준 용기에 그들은 크게 감명되었다.
7. 이들 동지들은 이상태를 중심으로 다시 독립운동에 박차를 가하기로 굳게 맹세하고 자금을 거출(醵出)하여, 진주에 갑을여관[甲乙旅館, 현 갑을탕(甲乙湯)]을 신축하여 이상태에게 운영케 하고 이곳을 독립투쟁의 거점으로 하였다. 이상태는 이 여관의 운영을 가장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였고 이 여관은 많은 독립투사들의 도피 또는 휴식처로 제공되었다. 이상태의 독립자금 모금은 일관되게 계속되었다.
8. 이상태는 남해 출신으로 어업에 남다른 감심(感心)을 가졌으며 어업 경영에도 특출한 재능을 발휘하였다. 그는 진주 갑을여관을 운영하는 한편 향리 삼동면 지족리에서 어업을 경영하였다. 이 어업 경영은 독립자금 조달의 일환으로 여겨진다.
일제는 조국 강점 이후 농토의 수탈뿐만 아니라 어업권도 약탈하는 만행을 서슴치 않았다. 그리하여 남해 연안의 어업권도 날로 일인들에게 잠식되었다. 사방이 바다에 둘러싸인 남해는 도민(島民)의 생활 터전이 무엇보다도 어업에 있음을 누구보다도 익히 알고 있는 그는 극도로 분개하여 일인들의 간계를 저지하고 빼앗긴 어업권을 되찾아 주고 어민보호에 사재를 털고 신명을 아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