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라는 이름의 내 바람기는 어느 날 고향 東海를 떠나 파리의 세느 강변을 거닐면서 시작되었다. 유럽에서 아시아로, 남태평양에서 미주로, 다시 히말라야에서 인도 대륙으로, 그리고 나는 남해를 찾아갔다.’
여행노트를 뒤적이다가 이 짧은 한 줄에 덜컥 마음이 걸렸다. 지난 여름 약 40일간을 북인도의 오래된 미래 라닥에서 보낸 나는 집으로 돌아온 날부터 몸살에 시달리며 남해에 갈 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차례 국외 배낭여행을 끝내고 돌아올 때마다 내 나라 산하를 밟으며 몸풀기에 길들여져 있던 나는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막상 남해에 가려고 하니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도 그렇지만 오래 자리를 비운 탓에 내 손을 기다리는 일들이 너무나 많았다. 나는 북인도 오지의 잔상들을 음미하며 하루하루 밀린 일을 처리하면서 늦더위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수시로 내 몸이 ‘남해! 남해!’ 노래를 하는데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었다.

나를 부르는 남해

나는 차에 기름을 채우고 아직 인도의 카레냄새가 그대로 남아있는 배낭을 챙겨 집을 나섰다. 나는 한 장의 지도가 필요했지만 지도가 없어도 갈 수 있는 내 나라 남쪽 땅, 남해로 가는 길 위에서의 시간들은 충분히 나를 가슴이 뛰게 했다.
섬에 가면 육지로 알고 살았던 어느 땅도 결국 섬이듯이 그렇게 보면 세상에 섬 아닌 곳은 없겠지만 70여 개의 또 다른 크고 작은 섬을 거느리고 있는 남해를 생각하면 우선 덩치 큰 어른이 토끼 같은 아이의 손을 잡고 있는 듯한 남해군의 지도가 생각이 난다. 남해읍과 설천면, 고현면, 서면, 남면이 있는 쪽이 어른이라면 금산이 있는 상주면, 이동면, 미조면, 삼동면, 창선면은 토끼모자를 쓴 어린아이의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지도는 강진만과 앵강만을 양쪽에 두고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있을 뿐 아니라 마주보고 이야기하는 형상이어서 화합을 이루며 살아가는 남해의 사람들을 보듯 매우 아름다운 상징으로 다가오고 있다. 한 때는 남해지도만 보아도 아이의 손을 잡고 가고 싶은 행복한 마음이 연상되곤 했었다.
지금은 하동군과 남해 설천면을 잇는 남해대교뿐 아니라 남해 창선면에서 삼천포를 잇는 크고 아름다운 다리 연륙교가 생겨 출입이 수월해진 편이지만 그러나 남해는 육지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우리나라 남해안 가운데에 있는 섬이라는 인식이 남아있는 것도 사실이다. 남해에는 이제 4개의 섬 마을을 5개의 다리(단항교. 창선대교. 늑도대교. 초양대교. 삼천포대교)가 연결해주고 있어 지금은 육지나 다름없지만 그래도 800리 해안 절경을 따라 도는 남해를 생각하면 ‘南海島’라는 단어가 마음 안에 먼저 자리를 잡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연인처럼 반기는 앵강만

대진고속도로를 달려 진교 IC를 이용해 다시 남해대교를 건너 덕신 월곡 방향으로 접어든 것은 해안도로를 달리면서 한순간이라도 빨리 바다를 보고 싶은 욕심 때문이었다. 지난 봄 온산에 붉은 꽃물들이며 흐드러지게 피어있던 망운산 철쭉군락지로 오르는 길은 때가 때이니 만큼 눈 닿는 곳마다 누렇게 익은 벼를 추수하는 사람들과 추수한 논에 마늘을 파종하는 농부들이 많았다. 지난여름 태풍 매미로 인한 피해는 산으로 오르는 길을 막고 쓰러져있는 나무들을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도처에 태풍의 상흔은 남아있었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들판의 가을은 누런빛으로 풍성히 여물어가고 있어서 보기에 좋았다. 
망운산을 내려와 작장, 예계, 장항을 들러본 다음 구미포구로 들어갔다. 마을 방파제 끝에서 허리 꺾어진 방풍림과 부서진 건물과 포구에 세워놓은 배를 향해 카메라 셔터를 눌렀더니 아니나 다를까 돌아오는 길에 구미파출소순경이 왜 사진을 찍느냐고 묻는다. ‘너무 아름다워서’라고 답하고 싶었으나 차마 그럴 수 없어서 태풍피해 현장을 찍는다고 했더니 무슨 잡지사에서 왔느냐고 한다. 그렇다고 하고 암수바위가 있는 가천을 지나자 섬과 섬 사이로 조용히 해가 떨어지고 있었다. 코스모스가 반기는 월포 언덕에 올라서자 거기 그토록 그리웠던 바다 앵강만이 오랜 시간 목마르게 기다리던 연인처럼 나를 반기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나의 남해 여행은 눈썹모양의 해안선을 가진 달뜨는 포구, 월포마을이 발아래 있고 오른편 옆구리에는 눈이 모자라도록 넓은 태평양과 호수 같은 앵강만을 동시에 조망할 수 있는 휴양촌 언덕에서 시작하여 휴양촌 언덕에서 끝나는 코스를 택하고 있는데 몇 달만에 다시 찾아간 이번 남해행도 다르지 않았다.<계속>

 
 
 
 
 
 
 
 
저작권자 © 남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