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 년 내려오던 우리조상들의 안식처
아픈 배 주무르던 정취도 핵가족에 밀려나
한민족의 손때. 문명의 뒤안길에서 그 맥락을 찾아보는 옛 우리조상들의 숨결과 생활상을 재 조명해보는 안방.
가는 세월에 얹혀 우리생활 주변의 많은 것이 달라졌다.
대부분은 나아졌지만 오히려 후퇴하는 것도 적지 않은 것 같다.

그중엔 우리의 안방 신세도 뺄 수가 없다.
예전에는 가정생활 거의가 안방을 중심으로 해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어머니의 아늑한 품처럼, 할머니의 따스한 손길처럼, 형용할 수 없을 만큼 마음 깊은 곳에 새겨진 마음의 고향, 바로 그 따뜻했던 온돌 방(안방).
젖먹이 시절에서부터 걸음마를 처음 시작했고 그렇게 장성한 후 죽음의 세계로 떠날 때 맞아들이던 방이 안방이였다.

사랑방이 따로 있어 여자들의 생활공간인 안방은 여인들에겐 한숨의 방이기도 했지만 한 가정의 구심점으로써 대를 물려 한집안을 다스리는 사령부였다.

곳간 열쇠를 가진다는 것이 곧 안방주인이 된다는 것이다.

드센 시어머니야 죽을 때까지 열쇠 꾸러미를 손에 쥐고 눈을 감았지만 힘 부치고 정신이 밝지 않으면 열쇠 꾸러미를 며느리에게 물려주면서 함께 물려주는 곳이 안방이다.

며느리 에겐 더없는 영광 이였다.
그래서 안방 차지를 한다는 것은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 봉사 3년, 석 3년을 지나고나니 열두 폭 치마가 눈물로 다 젖었다 는 시집살이에서 안방차지는 꿈같은 일이기도 했다.

시어머니 죽자 안방차지가 내 차지라는 속설처럼 어렵게 차지한 안방, 그러나 그 안방을 차지한 그 여인은 꿈을 이룬 것일까?

어떻게 바깥 양반이 거처하는 사랑방의 대칭으로 안주인이 산다 하여 안방이랄 수 있는가?
차라리 안방은 감옥이요, 눈물과 한숨이 가득한 설움을 삭이는 곳이 아니었을까?

불만과 억압 속에 살아온 반평생, 꽃 같은 얼굴이 늙은 호박처럼 됐고 부드럽던 손은 더덕처럼 됐을 때 어느덧 안방으로 옮겨진다.
그러나 어쩌랴!
안방을 차지했다는 미소가 가시기도 전에 남편은 보란 듯이 첩을 얻었다.
여우같이 젊고 예쁜 첩이 길래 남편은 거기에 홀려서 안방 문이나 기웃거리기나 했던가? 안방 할머니의 한숨이 서린 그곳은 할머니가 시집올 때 가져온 퇴색한 농이며 반짇고리 따위가 있었다.

또 할머니들은 옛 애기를 자주 하면서 호랑이 담배 피우던 얘기로부터 도깨비얘기 등 갖가지 얘기로 밤을 새운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할머니 무릎에서 스스로 잠이 들곤 했다.
새벽에 오줌이 마려워 일어나보면 할머니는 그때까지도 등잔의 심지를 돋우며 바느질을 하고 계셨다. 따라서 할머니의 방은 더없는 교육장의 방이기도 했다.

깜박이는 호롱불 밑에서 바늘에 실을 꿰어 바느질을 하는 할머니의 정성이 깃든 안방도 이제 그 이미지가 사라진지 오래다.

핵가족제도가 보편화 되면서 할머니들의 방은 저만큼 따로 떨어져 나갔고 겨우내 문풍지가 울던 그 방은 보지도 않은 책 진열 방으로만 변했다.

가끔 나오는 삶은 고구마 같은 간식도 안방에서 먹었고 안방에 엎드려 책도 보고 낮잠도 자곤 했었다.

그런 날의 어머니들은 한쪽 구석에서 반짇고리를 끄집어내어 옷을 꿰매거나 잡다한 일거리를 만지고 계셨던 것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어쨌거나 나뿐만이 아니라 온 식구가 안방의 문지방이 닳도록 들락거렸다.
그런데 요즘의 안방은 아이들과는 너무 멀어져 버렸다.
숙제는 물론 자기들 방에서 공부도 한다. 밥은 식탁에서 간식 따위도 안방이 아닌 곳에서 한다.

옛날 시어머니에게서 며느리에 물려지는 안방은 집안 살림의 이양 이었다.
오늘날 많은 시어머니들은 미리 안방을 내주고 있다.
그 며느리들은 이제 안방을 값비싼 가구에게 내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할머니들의 약손도 화로도 반짇고리도 이젠 먼 옛날의 애기로만 들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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