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대대로 대물림해 온 전통적 지게

농경생활의 시작과 함께한 우리민족의 숨결과 손 때 등 문명의 뒤안길에서 그 맥락을 찾아 수 천년동안 조상들의 생활로 면면이 이어온 서민들의 혼과 한이 서려 있는 지게다리.

숱한 사연과 함께 조상의 얼을 간직해온 흘러온 역사가 묻은 지게에 대한 우리의 온갖 슬픔과 기쁨을 같이해온 ‘한국의 멋! 지게’를 재조명해본다.

<편집자 주>

지게는 우리조상 대대로 내리 사랑의 대물림으로 받아 내려온 전통적 지게로 우리농촌에서는 결코 없어서는 안 될 운반용 도구(노동도구)였다.

꼬마에서부터 할아버지에 이르기까지 농촌에서의 지게는 생활의 벗이기도 했지만 조상 대대적 애환을 같이 해온 우리들 신체의 일부분과도 같은 것이었다.

울어도 울어도 시원찮은 슬픔과 한숨, 괴로움은 물론 기쁨을 맞으면 지게다리를 두드리며 뛰어 나가는 등 숱한 사연들을 간직하고 있는 지게는 우리민족에겐 생활도구이기 이전에 애환을 같이해 온 반려자이기도 했다.

우리나라 민속물 중에 거의 대부분이 중국으로 부터 전래 됐지만 지게만은 우리조상들이 각종 운반수단으로 짐을 나르기 위한 방법으로 창안한 나무로 만든 운반기구로서 우리민족 고유의 창작품이란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정이 통하고 선조들의 채취가 그대로 풍기고 있는가 하면 아직도 시골 농촌에 가면 지게의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있다.

우리의 할아버지들은 오랜 세월동안 지게와 함께 살아왔다.

꼭두새벽부터 떠지지도 않는 눈을 비비며 헛간에 세워둔 지게부터 찾아 들로 산으로 나가야 했다.

아내가 새벽밥을 지을 동안 풀이라도 한 짐 지고 와야 맘이 흡족해지기 때문이다.

지게는 계절에 따라 농부의 마음을 실어 나르는 것이기도 했다.

지게 없이는 하루도 생활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손이 얼어 터질 것 같이 바람이 매서운 엄동설한에는 땔감을 구하기 위해 잔설이 깔린 험한 산길을 지게와 같이 헤매야 했다.

지게는 사람이 갈 수 있는 곳은 어디나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좁은 길, 고갯마루, 수풀 속 등 그러면서 여러 가지의 용도로 우리조상들과 함께 숨 쉬어 왔던 것이다.

지게를 보면 우리민족의 수난의 역사가 앙금처럼 서려있다.

무거운 짐을 져도 다리만 상하지 않으면 된다는 억눌림, 그것으로 숱한 사연을 안고 지게와 함께 살아 왔었다.

한편 지게는 나름대로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

고구려때의 고려장도 지게와 함께 감당해야 했던 그 슬픔 역사중의 하나다.

또한 민족상잔의 전쟁인 6·25 동란 때에는 아들의 지게에 올라 앉아 고향을 뒤 돌아 보며 내키지 않은 피난길을 떠나는 노인들의 모습도 볼 수가 있었던 그때 그 일들.

이처럼 우리 선조들의 슬픔까지도 함께 나눈 지게는 때로는 천연의 생활 악기도 되고 피곤한 몸을 누일 수 있는 안락의자 역할도 했다.

들길에 나와 풀을 베다가 새참에 막걸리까지 거나 하게 한잔 한 농부들은 빈 지게를 메고 작대기로 지겟다리를 두드리면서 그 장단에 맞춰 노랫가락을 한 곡조 뽑았다.

또 여름 땡볕아래 논, 밭 일로 늘어진 몸을 시원한 정자나무그늘 밑에 잠시 누일 때면 저절로 잠을 청해 낮잠을 들기도 하여 피로감을 들어 주기도 했다.

이같이 지게는 훌륭한 안락의자 노릇도 하였으며 휴식을 취하는 농부들에겐 안성맞춤이었다.

이제 지게는 역시 문명의 새 물결 아래 농부들의 천한 벗이 되지 못하고 경운기나 리어카. 자동차에 점차 밀려 나는 등 겨우 명맥을 이어 가고 있는가보다.

그러나 털털거리며 지나가는 경운기의 소음 속에선 우리만의 낭만도 그리고 멋도 느낄 수 없음은 그 옛날 우리조상들의 그 모습만이 그립고 아쉬울 뿐이다.

찌든 가난 속에서도 그래도 지게가 있었기에 온갖 가정 일을 도맡아 운반 작업을 해치운 일등공신으로 윤택한 가정을 꾸려 왔으며 푸짐한 마음을 간직한 채 우리민족 고유의 노동기구로서 할 일을 다해냈다고 할 수 있다.

수 천년동안 애환이 담긴 지게는 우리들에게 근면과 성실과 함께 농부의 마음을 이어주고 달래어 주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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