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게 찾은 취재원의 첫마디, "남해사람이 아닌데....". 순간 기자의 입에선 "진작 아니라고 하지"라는 말이 나올 뻔 했다. 하지만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라며 이내 사태를 수습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진상규명(?)을 하기로 했다.


 부산우체국 후문 맞은 편 신창한의원. 알만한 독자들은 벌써 '아'하고 웃음을 지을 것이다. 기자는 몇 년간 군향우회지에 신창한의원이 소개되어 있고, 원장이 여성이어서 충분한 취재원이라 판단했다. 게다가 대한여한의사회 회장이라는 그녀의 직책이 눈길을 끌었던 것이다. 만나기 전 몇 번의 통화를 했는데 왜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까. 편하게 이야기를 듣던 중 새로운 호기심이 발동했다.


 당초 그녀는 약사였다.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강릉에서 꽤 잘나가던 약국을 경영하던 그녀는 현재의 남편인 김건수(읍 남변동) 향우를 만나 결혼을 하고 부산으로 왔다. 고인이 된 시아버지(고 김한준)는 당시 한약방을 운영하고 있었다.


 약사의 눈에 펼쳐진 한약의 세계는 그녀를 매혹했다. 첫아이를 낳고 그녀는 한의대에 입학했다. 처음에는 말리시던 시아버지도 그녀의 결심이 서자 당신이 손자까지 봐주시며 후원인이 돼주었다. 그런데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고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가업의 전권을 그녀에게 넘겼다. 당시는 여한의사가 귀한 시절이라 환자들은 '선생은 어디갔느냐'며 그녀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녀는 "그때는 원망스럽고 어려웠지만 지금 생각하면 오히려 시아버지의 결단이 옳았다고 생각한다"며 시아버지 교육방법을 인정했다.


 결국 그녀는 약사경력 8년에 한의사 자격까지 소유해 동서양의 약학을 두루 섭렵했고, 시집온 며느리가 시댁의 사업을 더욱 확장하여 50년째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한의대 3학년인 그녀의 딸이 3대째 가업을 잇게 될 것이다.


 신창한의원에 들어서면 낯익은 얼굴이 보인다. "아버님이 남해사람들을 좋아해서 직원 대부분을 남해인으로 뽑았다"는 것이 그녀의 설명. 카운터에서 약재실까지 7층 전체를 둘러보면서 기자가 아는 향우도 제법 만났다. 아들이 아니라 며느리에게 가업을 물려준 점이나 직원구성을 보면서 고인의 인품과 고향사랑이 느껴졌다.


 현재 권 원장은 대한여한의사회 회장이다. 한의사로서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여성으로서의 역할 또한 만만치 않다. 여한의사회는 일제시대의 대표적인 희생양이었던 정신대할머니의 치료를 맡고 있는 것에서부터 호주제에 이르기까지 여성문제에 대한 관심이 많다. 그녀는 "현재의 호주제는 분명 문제가 있다. 당장 폐지는 어려울지 몰라도 부모성 같이 쓰게 한다든지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그녀는 또한 대한한방해외의료봉사단 라오스 의료봉사단장으로서 지난달 초 7박8일 동안 라오스 현지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돌아왔는데, "여자가 사회활동을 하면 남자가 친구처럼 많이 도와줘야 한다"며 자신의 집안 분위기를 간접적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기자의 착오는 "친정은 멀고, 남편 고향이 내 고향이죠"라는 그녀의 믿음에서 비롯됐다.


 그녀의 그러한 믿음은 단지 아내여서 남편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이 자리에 있게 한 시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고마움,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따뜻함이 빗어낸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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