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문화와 한민족의 숨결과 손때 등 문명의 뒤안길에서 그 맥락을 찾아 수 천년동안 우리조상들의 생활상 등 면면이 이어온 서민들의 혼과 한이 서려 있는 정자.

이 정자에서 한 시대의 멋과 풍류를 즐겼던 우리조상들의 숨결이 담겨져 있었으나 이젠 찾아보기조차 힘들 정도로 사랴져 가고 있다.

조선조 초기 때부터 세워진 정자는 정방형과 육각형 또는 팔각형 등의 형태로 다양하게 건축 되어 졌다는 것이다.

조선조 정조때 이조판서와 대재학을 지낸 남공철의 시에서 보듯 예부터 절경지엔 으레 정자가 서있다.

바위벼랑이 있고 강물이 돌아 흐르고 거기에다 등이 굽은 소나무라도 몇 그루 서 있는 곳이라면 정자 자리로써는 금상첨화다.

비록 자연속에 들어선 인공물이기는 하지만 자연을 파괴 하기는 커녕 오히려 주위경관과 유합 조화를 이뤄 왔다.

아름드리 굵직한 기둥이나 날아갈듯 민첩 하면서도 빼어난 기와지붕의 곡선은 가히 한국미의 극치라 할 수 있다.

정자는 사람이 사는 주택은 아니다. 선비들이 사색하거나 덕담을 나누고 신선놀음으로 주연을 베푸는 곳으로 그 주 기능은 유흥상경(遊興賞景)에 있었다.

시를 읊거나 우국충정을 논하고 또 연회를 통해 사교를 다지는 등 정자는 선비문화의 요람으로 기능해 왔었다.

이밖에 그 지역의 공용 사랑방 구실도 해 왔으며 어떤 행사 때는 공용 집회장의 역활도 겸해 왔다.

또 전시엔 지휘본부나 관측소로써도 정자는 유용하게 쓰였다.

현재까지 우리나라 곳곳에 남아있는 정자와 루(樓) 대(臺) 각(閣) 당(堂) 등은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들은 주로 조선조 초기에 세워진 건축물이라 한다.

이 같은 예의 대표적인 정자가 강릉의 船橋莊(선교장)의 活來亭(활래정)이나 밀양객사의 嶺南樓(영남루)를 들 수 있다.

정자는 비록 서민과 동떨어진 사대부계층의 전유물이었지만 조선조 귀족문화의 현장구실을 똑똑히 해냈을 뿐 만 아니라 건축사에서도 뻬 놓을 수 없는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정자와 樓(루) 또는 臺(대)나 閣(각) 등은 어떻게 다른지 확실한 분류는 할 수 없다.

따라서 남해군에서는 올해부터 지역주민들의 편안한 휴식공간이자 마을의 쉼터인 정자 쉼터를 조성 제공키로 하고 오는 2011년까지 5년간 연차별로 145개 마을을 대상으로 마을당2000만원씩 모두 5억2000여만원을 지원 해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정자쉼터는 15평방미터의 시설규모로 마을여건과 지형에 따라 설치하도록 하고 있으며 사계절 전천후 휴식공간으로 활용하도록 돼 있다

따라서 농촌의 힘든 농사일에서 잠시 벗어나 주민들이 담소를 나누며 휴식을 취하는 공간으로 주민들에게 활력을 크게 불어 넣는 곳으로 더욱 사랑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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