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금(李終今)은 함경도 길주의 호족인 이시애(李施愛)의 누이동생으로 이명효(李明孝)에게 시집갔다.

길주 인근 최고 세력가의 여식으로 부러울 것 없는 생활을 누리던 종금은 오라버니 ‘이시애의 난’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여생을 남해현 관비로 마감하는 비운을 맞는다.

아들 이철산(李哲山)을 10여 년이 지난 1478년 2월 남해에 정속하여 명천(明川) 사람 동효명(童孝明)으로 하여금 거처와 음식 제공의 책임을 맡게 한 것으로 보아 모자가 같이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양반집 마님에서 관비의 신분으로 급전직하 한 종금은 당시 30세 전후의 나이로 상당한 미인이었다. 그래서인지 남해현에 사는 많은 이들이 처나 첩으로 삼으려 했지만 18년 동안 몸을 더럽히지 않고 절조를 지켜 어전회의에 상서될 정도였다. 종금은 남해현의 관비임에도 불구하고 절의를 지켰다는 기록이 1486년(성종 17) 1월 16일자 『조선왕조실록』의 기사에 수록되어 있다.

강릉 대도호부사 조숙기(曹淑沂)가 하동현성, 남해현성, 진해현성, 안골포진의 개축에 대해 성종에게 상서하면서 이시애의 누이동생이자 이명효의 처인 종금의 절의를 칭찬하고 표창할 것을 상서하였던 것이다. 그 기사의 중요한 부분만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전략>이명효의 처 종금은 예속되어 남해의 관비가 되었는데, 용모가 단정하고 나이가 그렇게 늙지 않았으며, 여공(女工)에도 능하여, 이 때문에 데려다 처첩(妻妾)을 삼으려고 하는 자가 많으나 굳이 거절하고 따르지 않아서 이제 18년이 되었으니, 강포한 자에게 더럽히지 않았으므로 고을 사람들이 그 절의에 탄복합니다. 신의 뜻에는 적신이라는 이유로 그 절의를 폐할 수는 없다고 여겨지니, 원컨대 포장(褒奬)을 더하소서.<하략>”

조숙기의 상서에 대해 성종은 영돈녕(領敦寧) 이상에게 의논하게 하였다.

그 결과 정창손(鄭昌孫), 윤필상(尹弼商)은 절의에 대해 마땅히 표창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하지만 한명회(韓明澮), 심회(沈澮), 윤호(尹壕) 등은 대신을 보내 가부를 살핀 후에 다시 의논하자고 하였고, 홍응(洪應)은 한 사람의 소견으로 갑자기 포장할 수는 없다고 했으며, 이극배(李克培)는 역적의 누이이고 처이니 목숨을 보전하고 있는 것도 족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성종은 하교를 보류하여 표창에 대한 결론을 알 수가 없다.

종금이 남해현의 관비로 예속되는 유배형을 받아 18년 이상 절조를 지켰고 그것이 어전회의에 붙여졌다는 사실은 실로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오라버니와 남편을 비롯한 일족이 역적죄로 도륙되고 혼자 몸으로 섬에 천하디천한 노비로 유배된 상황에서 자신을 범하려 한 이들에게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지켜온 것은 ‘두 지아비를 섬길 수 없다’는 조선시대 여인네의 한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시애의 난’에 연좌되어
남해현 관비로 예속되다

종금은 1467년(세조 13) 8월 12일 이시애가 처형되어 난이 진압된 후 연좌되어 남해로 유배되었다.

그 후 1486년에도 남해현의 관비로 있었던 것과 이시애가 복권되지 않았기 때문에 남해현의 관노로 일생을 마감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시애의 난으로 인해 남해로의 유배형을 받은 사람은 종금과 그의 아들 이철산 외에도 이효종의 처 백시, 이효순의 형 이효상, 이효정, 이예중, 최자지의 아들 최금동 등이 있다.

종금의 오라버니 이시애(?∼1467)는 조선 초기의 무신으로 본관은 길주이다. 그는 대대로 길주에서 살아온 지방호족출신으로 조선초기 대북방민 회유정책으로 중용되어 1451년(문종 1) 호군, 1458년(세조 4) 경흥진병마절제사를 거쳐 첨지중추부사, 판회령부사를 역임하였다.

함길도는 북방 이민족과 대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방 호족 중에서 수령 등 지방관을 임명하여 다스리고 있었다.

하지만 세조가 즉위하면서 중앙집권정책을 펴면서 북도출신의 수령을 점차 줄이고 지방관을 중앙에서 직접 파견하였다.

또한 호패법을 강화하여 지방민의 이주를 금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중앙집권정책은 지방호족과 대토지소유자의 격심한 반발을 유발시켜 유향소(留鄕所)를 중심으로 하는 반정부활동을 부추겼다.

1467년(세조 13) 5월 회령부사를 지내는 중 모친상을 당하여 고향 길주에 머무르게 된 이시애는 자신의 지위 확보에 불안을 느껴 아우 이시합(李施合), 매부인 종금의 남편 이명효 등과 모의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남도의 군사가 쳐들어와 북도의 군민을 죽이려 한다는 소문을 퍼뜨려 민심을 혼란시키고 함길도절도사 강효문 등 중앙에서 파견한 지방관을 차례로 살해한 후 강효문이 한명회, 신숙주 등과 결탁하여 죽였다고 거짓 상소를 하였다.

이시애는 함길도 내 유향소의 토호들과 농민들을 규합하여 거대한 반란 세력을 형성하고 절도사를 자칭하였다. 반란군은 단천, 북청, 함흥 등을 점거하였다.

보고를 접한 세조는 단천 출신 최윤손을 보내 위무하고자 했지만 그도 이시애에 동조하고 말았다. 반란군은 한명회, 신숙주, 권람 등 중신들도 내은하고 있다는 거짓정보를 흘려 혼란을 유도하였다.

이에 세조는 구성군(龜成君) 이준을 4도병마도총사, 호조판서 조석문을 부총사, 허종을 함길도절도사, 강순, 어유소, 남이를 대장으로 임명하여 3만의 관군으로 반란군을 토벌하게 하였다.

이시애는 여진족까지 끌어들여 대항하였지만 반란이 일어난지 3개월만인 8월에 흥원, 북청, 이원 등의 전투에서 대패하고 여진으로 도망치려 하였다.

하지만 아버지가 억지로 이시애에게 끌려갔다는 소식을 들은 허유례에게 생포되었다. 허유례는 이시애의 처조카로 이주와 황생을 설득하여 이시애 형제를 잡아 토벌군에게 인계하면서 반란은 평정되었다.

이 난으로 길주는 길성현으로 강등되고 함길도는 남·북 2도로 분리 되었으며, 유향소도 폐지되었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반란으로는 이시애의 난을 비롯하여 1624년(인조 2) 인조반정의 공신책록에 불만을 품은 평안병사 겸 부원수 이괄의 난과 1728년(영조 4) 김일경이 처형되자 소론과 남인이 연합하여 일으킨 이인좌의 난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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