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독일 최대의 시사주간지 '슈피겔'이 지난 9월 15일자 발행호를  통해 남해군이 30년 전 독일에 건너가 광부, 간호사로 일해온 독일교포들의 귀향을 위해, 현재 삼동면 물건리에 조성중인 독일교포 정착촌 '독일마을'에 대한 기사를 게재했다.
이에 본지는 독일마을을 독일인의 눈으로 본 슈피겔의 기사가 군민들의 다양한 시각 확보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에 해당기사의 번역문을요약,게재한다.(참고로 번역기사는
www.koreaheute.de(Spiegel der deutschen Presse)에서 퍼 왔으며 '서구박물관마을'이라는 큰 제목을 제외한 나머지 제목들은 본지가 독자들의 편리를 위해 달았다).
아래는 슈피겔 기사를 요약, 게재한 것으로 최대한 번역문을 그대로 살렸다.  <편집자주>

  
 
  
현재 마을조성공사가 한창 진행중인 삼동면 물건리 독일교포
정착촌.
 

 남해섬에 사는 독일인들

독일에서 귀국한 파독 근로자들이 한 휴양단지에 입주했다 - 그리고 모국 사람들에게 독일 생활양식을 선보이고 있다.
우천자씨(66세. 우춘자씨의 잘못된 표기-편집자주)는 모국 사람들의 호기심에 아직도 더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간호사 출신인 우씨는 매일 50명이 넘는 관광객들을 자신의 집과 정원으로 안내한다. 우씨는 올해 초부터 한국에서 다시 살고 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조국에 둥지를 틀은 것은 아니다: 우씨는 독일인 남편 빌헬름 엥겔프리드씨(73세)와 함께 한국 남해 섬에 위치한 "독일 마을"에 거주하고 있다. 이 지역 자치정부는 휴양단지의 일부로, 1960년대 중반부터 외국인 근로자 자격으로 서독으로 이주했다가 귀국한 한국인들을 위한 특별 주거단지를 설립했다.

60년대 독일, 한국간호사 대환영

당시 독일은 간호사 약 1만 명과 광부 8천명 가량을 한국에서 모집했다. 특히 서독에 막 도착한 한국여성들은 이국적 미인들로 현지에서 주목을 받았다. 독일 신문들은 환호했다. 독일 종합병원들의 간호인력난을 완화하기 위해서 "한국출신의 매력적인 지원인력들"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했다. 한국인들은 자신들을 초청한 나라에 곧 적응했고, 독일인들과의 결혼도 빈번했다. 그러나 간호사 출신인 우씨는 많은 한국인들이 그러하듯이 자신도 노후를 다시 한국에서 보낼 수 있기를 늘 소망해 왔다고 한다.
몇몇 파독 한국인들에게는 이제 귀국의 꿈이 실현되었다: 남해 지역 정치인들은 부부 55쌍을 위해 저렴한 가격으로 주택부지를 제공했다. 조국은 이를 통해 파독 간호사들과 광부들의 외국에서의 활약에 대해서도 고마움을 표시하고자 한다. 파독 근로자들은 독일에서 많은 돈을 송금함으로써, 한때 매우 빈곤했던 이 아시아 국가의 경제발전을 재정적으로 지원한 바 있기 때문이다.

독일마을, 남해 이익도 고려한 곳  

원래 주로 농민들과 어민들이 살고 있는 남해 지방이 지역의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파독 근로자들의 귀국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한국 안의 독일마을 거주자들은 구조적으로 취약한 이 지역에 관광사업을 통해 벌어들이고자 하는 수익을 가져다주어야 한다. 현재 공사중인 오리지널 독일식 선술집과 빵집, 그리고 호텔도 추가로 매년 관광객 십만 명의 발길을 서구 박물관 마을로 향하게 만들어야 한다.
1차 단독주택 5동이 이미 완공되었다. 이 건물들은 독일 주택보험 선전책자를 모델로 했다고도 할 정도다. 한국 관청들은 지붕들이 - 빨간 기와들은 독일에서 콘테이너로 해상으로 운송해 왔다 - 그 각도가 적절히 휘어져 있는가 여부도 엄격히 감독하고 있다.
전직 간호사인 김우자씨(63세)와 독일인 남편 루트비히 슈트라우스-김씨(76세)도 이런 경험을 해야 했다. 이 부부가 최근 마인츠에서 이주해 왔을 때, 주택공사가 잠정 중단되어 있었다. 지붕각도가 가 45도에 못 미쳤기 때문에 지역신문은 의구심을 표명했다. 그러나 이 부부는 결국 입주허가를 받았다.  재정분야 공무원 출신인 슈트라우스-김씨는 근처 박물관에서 열리는 포도주 시음회에서 독일 포도 종들의 특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독일에서도, 한국에서도 '외국인'
 
귀국한 파독 근로자들은 저녁마다 엥겔프리트 부부네 베란다에 함께 모여 박물관 안내자로서의 하루 일과에 지친 심신을 달랜다. 독일 생활 초기 시절 독일 음식이 얼마나 지독하게도 맛이 없었는지를 회상한다. 그들은 절절한 향수 속에서 피망을 넣은 독일식 배추 절임을 먹었다. 간호사들은 거의 독일어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많은 독일환자들이 우리한테만 간호를 받고 싶어했다"고 김우자씨는 자랑스럽게 말한다. 이 아시아 여성은 서구에서 30년 이상을 살고 나니 자신의 실제 고향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한국에서도 종종 외국인 취급을 받기 때문이다. 몇 년 전 간호사 우씨가 한국에서 독일남편을 소개했을 때, 고향의 친지들은 외국인과의 결혼을 창피스럽게 여겼다.

박물관마을의 성공

박물관 마을의 성공은 금방 입소문이 났다. 독일에서 귀국을 희망하는 한국인들이 관광 매니저(군 문화관광과 관광개발담당 계장-편집자주)인 김대환씨에게 매일마다 문의를 해 오고, 입주허가를 부탁한다. 그러나 김씨는 신청자들에게 친절하게 불가통보를 한다: "독일 마을의 수용능력은 이미 한계에 달했습니다."
( 기사작성: 빌란트 바그너 기자 번역 : HW Jeen)


슈피겔은 어떤 잡지?
독일 최고 권위, 세계적 시사주간지
권력에 대한 매서운 비판으로 유명


 
  
슈피겔  
 
미국의 타임지에 비유되는 1947년 발행된 독일 최고 전통과 권위를 가진 시사주간지, 전 세계적으로도 유명하다. 발행부수는 약 100만 부정도. 권력에 대한 매서운 비판이 보도방침이며 수많은 특종기사를 실었다. 1962년에는 독일군의 군작전 계획을 특종보도, 국가기밀누설죄로 발행인, 기자 등이 구속되는 어려움을 겪었지만 전세계의 비판 여론으로 인해 오히려 당시 독일총리, 국방장관 등이 물러난  일도 있었다.
주간동아는 지난 97년 통권 88호에서 '독일국민들이 슈피겔을 「독일연방 민주주의의 한 기둥」이라 부른다"고 표현했다.


취재배경, 그리고 보도이후 
"직접 거주, 조성하는 관광지라 흥미"
독일방송국 출연 등 취재요청 속속

 
독일교민들에 따르면 이번 슈피겔의 보도는 한국에서 독일마을과 관련한 텔레비전 방송을 본 미국 엘에이 타임스 한국 특파원이 슈피겔 동경 특파원에게 취재를 제안해 이뤄졌다. 이 두 기자는 실제 지난 8월 23일 남해를 방문, 1박 2일간 취재를 했다.
교민 김우자씨는 "기사를 쓴 슈피겔의 빌란트 바그너기자는 '일본에도 독일, 네덜란드 등 유럽형 건축물을 옮겨와 테마관광지를 조성한 적이 있는데 실패했다. 그런데 남해 독일마을은 단순히 유럽모양만 옮기지 않고 직접 독일인이 현지에 살면서 관광지를 가꿔가는 독특한 시도이고 이후 독일문화소개와 양국 친선관계 형성에 도움이 될 것이어서 흥미를 느꼈다'고 했다"면서 "슈피겔 보도 후 독일 공영방송국 ZDF의 유명 시사프로그램에서 출연요청이 들어왔고 여성잡지 '레벨'도  취재의뢰를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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