짚신은 우리네 조상들의 대표적인 신발이나 고공품(藁工品)중의 하나라 하겠다.

그러나 신분에 따라서 모양도 달랐던 짚신은 이젠 먼 아득한 얘기로 운동화와 가죽구두에 밀려 보기조차 어렵게 됐다.

우리선조들의 삶의 멋과 애환이 담긴 지혜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역사와 함께 이어 왔던 것이며 또한 서민층에서 두루 사용해 왔던 신이 바로 짚신이었다.

그러나 우리선조들의 풍류(風流)를 엿볼 수 있는 전통이 점점 사라져 가는 것이 안타까워 아쉽기만도 하다.

그래서 짚신은 한 여름철 또 다른 운치를 우리들에게 안겨준 신발의 예술품이기도 했다.

몇십년전만해도 웬만한 장(場)거리에서는 흔히 볼 수 있던 짚신전과 짚신장이는 이제 거의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이따금 상가(喪家)에서나 사용되는 수요를 대기위해 몇몇 촌노(村老)들이 시대의 유물인 짚신삼기를 계속 이어 왔을 뿐이다.

‘짚신도 짝이 있다’는 속담도 있다. 헌 짚신짝 버리듯 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떤 물건이건 아주 헌것이 되면 버리게 마련이나 특히 짚신을 꼬집어 비유한 것은 그만큼 천박하게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이 말들은 고무신이 널리 보급되면서 짚신의 이용가치가 사라져갈 당시 생겨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사실 고무신이 등장하기 전까지 수 백년간 짚신은 우리네 서민층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일용품이었다.

한 여름철 무더위를 달래면서 물에 자주 축여야 오래 신는다는 짚신.

과거길의 선비는 개나리 봇짐에 대롱거리는 짚신이 한양길에 모자랄까봐 신바닥이 얼마나 닳아졌는지 자주 바닥을 들여다보면서 오갔다는 일화도 있었단다.

그러고 보면 짚신은 우리 한민족에 있어서는 가죽신이나 나막신보다 더 정이 들고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짚신의 역사 역시 上古시대부터인데 삼국시대의 북부지방에선 가죽신을 남부지방에선 짚신 을 신었다는 기록이 있다.

오랜 세월을 이어오면서 짚신 삼는 법도 많이 발전하여 닥나무와 칡뿌리 백지 무명으로 만들기도 했고 왕골이나 부들을 가늘게 꼬아서 촘촘히 삼은 짚신은 부유층의 전용물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 들어 와서는 신도 계급에 따라 제한을 두었다고 전한다.

짚신은 그 종류만도 미투리 짚신을 비롯해 일반 짚신, 장식용 짚신, 장래용 짚신, 어린이용 짚신, 짚신 슬리퍼 등 다양한 짚신으로 1회용 등으로 만들어 냈다고 한다.  
이젠 그나마 모두가 보기조차 힘든 옛날 얘기가 되고 말았다

해방이후부터 나오던 검은 고무신, 노란 고무신, 흰 고무신도 운동화며 구두, 샌달들에 밀려 보기조차 힘든 실정이다.

한때 운전기사들이 여름철 무좀방지를 위해 짚신을 이용해 유행시킨 일도 있었다.
여름이면 짚신이 그렇게 시원 할 수가 없어 그것을 신고 시골길을 달리던 옛 시절 그때가 그립기만 하다.

가죽구두를 비롯해 각종 신발류가 눈부시게 발달한 오늘날의 상식으로 보면 짚신은 가난의 상징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랜 세월동안 면면히 이어 내려온 백성들의 혼과 가난에 찌든 서민들의 한이 서려 있는 유산임에는 틀림없는 일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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