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해문화원장 이효균
엊그제 같이 떠들썩하던 중국정부의 고구려 역사 왜곡문제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잠잠해 지고 쉽게 잊어버리고 있다.

동북공정을 주관하는 중국사회과학원 산하 변강사지 연구중심에서 “한강이북은 모두 중국영토”라고 하면서 고구려 발해는 물론 부여, 고조선까지도 중국역사라고 주장하는 논문이 발표되어 온 나라가 들썩거렸지만 어느새 가물가물한 기억일 뿐이다. 2004년 동북공정이라는 이름으로 고구려사 왜곡을 본격적으로 시도하자 각계각층에서는 중국정부를 성토하면서 정부의 특별대책을 요구하여 발 빠르게 움직인 정부는 ‘고구려 연구재단’을 만들고 중국정부에 대응하였으나 지금의 사정은 전혀 다르다. 고구려 연구재단은 없어졌으며 정부의 대응도 미약한 상태이다

중국의 동북공정(고대사 왜곡)의 저의(底意)

정치 사회적 안정 도모
공산당 1인 독재체제하에 강력한 통제력을 발휘하고 있지만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원리를 폭넓게 수용하고 있고 경제적으로 효과를 얻어 인민의 사고와 생활양상이 민주주의적으로 바뀌어 점차 통제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다는 인식하에 역사를 통하여 중국민족통합과 사회 안정을 꾀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동북지역 장악 및 역사적 명분 축적

동북3성(길림성, 요녕성, 흑룡강성)은 역사적으로 한족(漢族)이 아닌 다른민족이 통치해 왔다는 것과 근대 청(淸)나라에 이르기까지 한족과는 대립적 존재였고 특히 그 지역에 한국인의 잦은 방문으로 중국의 구심력(통제력)상실을 우려, 역사적으로 한민족의 속복(屬服)하에 있었던 지역이라 궤변을 늘어 놓고 있다.

역사적으로 중국은
다민족 통일국가라고 항변

이미 중국은 서부 지역과 남부 국경지대를 정리하고 이제는 동북부 지역의 확고화를 역사적으로 공고히 하기 위해 동북공정을 하고 있다고 본다. 중국의 서안(西岸)부근과 만주 등에서 발견되고 있는 유적과 유물이 한족의 선조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는 연구결과 중국의 역사를 끌어들이기 위해 역사조작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반도 통일 후 간도지역에 대한 영유권 분쟁을 사전에 차단하고 유사시 북한에 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역사적 근거마련을 위한 숨은 계략이 저변에 깔려있다는 학자들의 주장이 있기도 하다.

동북공정에 맞서
우리 역사 되찾아야
동북공정의 실체가 방송매체를 통해 들어나면서 국민들이 분노하고 있다.
동북공정은 중국이 향후 국제정세의 역학구도에 따라 북한에 변화가 생길 경우 한반도 영토 일부를 차지하겠다는 야심이 숨어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벌써 중국은 지도상 북한의 일부지역을 중국영토로 표기해 혼란을 가져오고 있다. (백두산 → 장백산) 이런 식으로 얼마 안가면 백제공정, 신라공정, 나중에는 한반도 공정이라는 망언이 되풀이 되지 않을까 누가 장담하겠는가.

우리는 이웃나라처럼 우리의 고대사를 정리하지 못하고 왜곡된 역사를 그대로 간직한 채 오늘날 뼈아픈 현실을 직시하면서 역사와 현실은 다르다는 것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영토 옛 고구려

심양(沈陽)
심양에 우리민족이 살기 시작한 것은 1869년부터라고 한다. 한반도에서 일부이민들이 심양에 오기 시작하면서 1910년 심양↔단동간의 철도가 개통된 후 서탑에는 조선의 상인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고 혼하강반(渾河江畔)에는 농민들이 황무지를 개간하며 살아왔다. 현재 인구 800만명의 대도시로 발전한 심양시에는 우리 백의민족을 비롯하해 한족(漢族), 회족(回族), 몽고족 등 12개의 민족이 어울려 살고 있으며 특히 12만여 명의 우리조선족은 민족의 얼을 잃지 않고 우리민족의 전통문화와 예절, 미풍양속을 지켜오고 있으나 최근 조선족 동포들이 5대 위기에 처해 있다고 하소연 하고 있다.

첫째, 200만 여명으로 알려져 있는 중국의 조선족이 180만 여명으로 줄어든 인구의 감소위기. 둘째, 조선학교수가 엄청나게 줄면서 발생하는 교육위기. 셋째, 이혼율이 높아지면서 젊은 홀아비와 늙은 총각들이 장가들기 어려운 혼인위기. 넷째, 각급 정부에 민족 간부 계승자가 줄면서 민족간부 비례가 낮아지는 민족간부 위기. 다섯째, 학생들은 성적 올리기 혈안, 젊은이들은 생계에 직면 돈 벌기에

발해대학
집착하는 민족문화 및 전통문화위기 등이다.
발해대학은 1992년 12월에 설립한 중국유일의 조선족 사립대학으로 조선족 인사들이 민족대학을 세우기로 결의하고 천문갑 교수 등 학자들이 빈손으로 학교를 세워 2006년까지 12회 20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 하였다.

집안(輯安)
집안은 고구려의 도읍지로서 우리의 역사가 삼한시대부터라고 한다면 가장 광대한 영토를 확장했던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은 우리 민족사에 가장 위대한 황제임이 분명한 것으로 본다. 집안은 북한과 중국 간의 국경이 되는 압록강변에 위치한 마을로 장수왕릉의 장군총이 있다. 장수왕은 당시 거의 불가능한 98세까지 살았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광개토대왕의 맏아들로 태어난 장수왕은 본명이 거련(巨連)이었다. 공개토대왕 18년(408)에 태자로 책봉된 후 부왕이 죽은 뒤 왕위에 올랐다(413). 등극 이듬해 고구려 왕실의 신성성과 부왕인 광개토 대왕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한 광개토왕릉비를 건립하고 427년에는 국내성(國內城)에서 평양성에 위치한 대성산성일대(大城山城一帶)로 천도를 단행하였다. 장수왕이 491년 98세로 죽자 개국공신 고구려왕으로 추증하고 시호를 강(康)이라 하였으며 장수왕의 무덤에 대해서는 중국 길림성 집안의 장군총(將軍塚)과 평양부근의 전동명왕릉(傳東明王陵)의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호태왕 비(好太王 碑)
동방의 패자(覇者)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은 소수림왕 4년(374)에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체격이 웅위하고 기상이 늠름하여 성인의 풍모를 지녔다’고 전하며 이름은 담덕(談德), 재위 시에 호태왕 또는 영락태왕(永樂太王)으로 불렀다.

광개토호태왕은 391년 18세의 나이로 즉위한 이후 22년간 재위기간에 남정북벌(南征北伐)을 개시하여 고구려사 및 민족사에 광개토경(廣開土境)의 위업을 이룩하였다. 호태왕비(好太王碑)가 19세기 말 재발견됨으로써 그 실체가 뚜렷이 나타나 당대 고구려사를 밝혀주는 최고의 금석사료(金石史料)로 평가되고 있으나 이 비(碑)는 고구려의 멸망으로 잃어버린 만주의 옛 땅과 더불어 역사의 비밀 속에 묻히고 말았다.

황량한 벌판에 서 있던 능비는 2층의 누각 속에 보호되었으나 화재로 소실 된 뒤 1962년 새로 건립된 단층 대형 비각에 유리를 사방에 막고 삼엄한 경비 속에 일반인의 접근이 금지되고 있다.

한편 최근 중국에서는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역사로 편입하는 동시에 호태왕비(好太王碑)도 중국의 유적으로 설정하고 광개토호태왕의 남진(南進)을 중국동북의 소수민족으로 획정하는 동북공정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이는 일본과 중국학계의 한국사 왜곡에 대한 비판으로 연결되고 외교사의 문제로 확대되고 있다.

국내성(國內城)
국내성은 고구려 2번째 수도이며 AD 3세기경에 축조된 고구려왕조의 2번째 도성으로 압록강을 마주 보고 있다.

직 사각형으로 길이가 2868m이나 모두 허물어지고 성내에는 아파트가 즐비하고 성의 흔적은 수십m에 불과하다. 집안의 국내성에서 북쪽으로 2.5㎞지점, 산속 깊숙이 환도산성이 있는데 산성으로써 흔적이 완연하다.

간도(間島)·용정(龍井)
그 옛날 우리 땅이었던 간도는 지금 길림성안의 연변조선족자치구로서 청나라와 조선 사이에 놓여 진 무주공간의 섬과 같은 땅이라 하여 간도(間島)라고 하며 조선 말기에 우리 조선인들이 이곳에 와서 새로 개간한 땅을 간도(墾島)라고도 하며 조선의 동북방향인 간방(艮方)에 있는 지역이라 하여 간도(艮島)라고 부르기도 한다.

오랫동안 고구려의 지배를 받다가 통일신라 때는 발해가 200여 년간 이 땅을 지배하였다.

간도의 땅 용정은 선구자의 터전으로 윤해영이 가사 말을 짓고, 조두남이 작곡한 “선구자”로 유명하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 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원래 일송정에 있었던 소나무는 일본이 한국인의 의기를 끊기 위해 폭격을 하는 바람에 죽어 버렸다 한다.

비암산의 일송정 풍경과 화룡시의 광활한 평강벌, 항일운동의 요람 용정시를 관통하는 북간도의 젖줄 해란강은 도문에 이르러 두만강과 합류하여 동해바다로 흘러간다.

용정은 1850년대 함경도 지방의 조선인들이 모여 마을 형성되었고 우물을 파고 이름을 용정으로 명명하면서 붙여졌으며 용정중학과 조선인들이 세운 대성중학이 있는데 저항 시인 윤동주가 다녔던 학교로 기념관과 윤동주시비가 세워져 있고 비면에는 서시(序詩)가 새겨져 있다.

죽는 날 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 운다.

두만강(斗滿江)
콩이 많이 생산되는 땅이라서 두만(斗滿)이라 하였고 콩의 들판을 흘러내린다고 하여 두만강이라고 했다는데 중국 쪽의 강변은 역시 콩 농사가 많았다. 푸른 물결위로 뱃사공이 유유히 노를 저어 나갈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하였다. 강 양안은 강물이기 보다는 개울 물 처럼 옅게 흐르고 푸른 물이 아니고 오염되고 더러운 흙탕물 이였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배 사공…”아아 그 옛날이어 노랫말에 불과하다. 중국 쪽 강변은 개간되어 옥수와 채소가 자라고 있는데 북한은 억새풀만 우겨져 있고 산에는 나무 한그루 자라지 않는 민둥산이다. 산허리와 강변에는 탈북자를 잡기 위한 초소가 을시 년 서럽게 보인다. 뗏목을 타고 강을 오르내리며 북한쪽으로 다가갔다. 뗏목에서 한 발짝만 내려서면 북한 땅이다. 갈대 속으로 윗옷을 벗은 런닝 바람의 북한 군인이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압록강(鴨綠江)·단동·위화도

압록강은 과연 한반도 제일의 강답게 넓고 양양하다. 그 옛날 어떤 사람이 청둥오리머리처럼 푸르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의 압록강 물은 너무 푸르렀다. 중국의 단동과 북한의 신의주를 양안에 끼고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압록강 철교는 1909.8-1911.10준공, 길이 944m, 넓이 11m, 모두12개의 아치가 있는데 현재 중국쪽에 4개만 남아 있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압록강철교는 부서진 철교 곁에 나란히 서 있다.

그러나 강위에서 바라본 중국과 북한은 너무나 대조적이다. 연암은 열하일기에서 ‘동으로 멀리 바라보니 의주, 철산의 연봉들이 모두 아득한 구름 속에 묻혔다’라고 썼는데 신의주는 옛날 그대로의 모습이란다. 변하지 않는 발전하지 않다는 말이다. 강 건너 신의주와 중국 단동은 너무나 현저한 차이를 나타낸다. 단동의 건물들은 하나같이 페인트칠이 새롭고, 단정하고, 빛나는데 반해 신의주의 모습은 ‘새로운 의주’가 아니라 너무나 음침하고, 어둡고, 거칠 기만하다. 녹슨 철선(鐵船), 생기라고 찾아볼 수없는 인민들, 과연 사람이 어떻게 살기나 한지 연민의 정을 느끼곤 한다.

철교에서 동쪽 4㎞ 쯤 압록강 중간에 위화도(威化島)가 있는데 500년 고려의 멸망을 몰고 온 이성계의 회군이 있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멀리서 바라본 위화도는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완연한데 수풀만 황량한 섬에 불과하다. 5만 여명의 고려 병사들이 한 달 이상을 들끌었을 위화도가 아닌가. 이성계가 저 삼각주에서 회군하지 않았더라면 최영의 뜻대로 과연 만주 땅을 되찾을 수 있었겠는가 ?

지금 중국은 고구려역사까지 저들의 변방으로 왜곡하려 하고 있는데…
중국이 동북공정이라는 것이 북한 땅까지 넘보겠다는 장래를 설정한 음모는 아닌지 ?
북한은 지금 무었을 하는지 적막에 잠겨 있고 압록 강물은 유유히 서해바다로 흐르고 있을 뿐이다.

<다음호에 계속>

▲ 고구려전성시대(영토확장)
▲ 우리조선인들이 세운 대성중학교 윤동주기념관 정면에 있는 윤동주 시비
▲ 중국 호산성에서 바라본 옛 고구려 땅 북한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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