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죽음으로 인한
노론 벽파의 짧은 득세

이인화의 소설 ‘영원한 제국’에서는 정조를 탕평책을 통해 정치적 안정을 이끌어내었고 근대적 개혁을 시도하다 벽파에 의해 독살을 당한 비운의 군주로 묘사하여 우리들의 인식을 혼돈스럽게 만들고 있고 있다.

그러나 역사기록과 정황을 보면 종조의 독살설은 터무니 없는 허구이다. 정조는 ‘수민묘전(壽民妙詮)’이라는 의서를 저술할 정도의 의학전문가로 죽은 순간까지도 자신의 약처방에 관여했다. 또한 내의원 도제조로 간병을 지휘하던 우의정 이시수도 소론 시파로 정조의 절대적 신임을 받았기 때문이다.

정조는 하루아침에 급서하지 않고 한달에 가까운 투병생활 끝에 50세의 나이로 서거한다.

그리고 정조 독살의 배후자로 지목되는 정순왕후(영조의 둘째 왕비)나 노론 벽파는 투약과정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반대파인 시파 역시 당시 벽파의 독살설에 대해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았다. 만약 조그마한 혐의만 있었더라도 1806년 김달순의 옥사로 인한 병인경화(丙寅更化)때 처절한 보복이 있었을 것이다.

또한 이후 지속된 안동 김씨를 중심으로 하는 시파의 집권기간 동안 이와 관련된 아무런 문제가 제기되지 않은 점도 정조의 독살설은 허구임이 명백하다는 증거이다. 정조 사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노론 벽파는 정국의 주도권을 잡는다. 하지만 그것은 5년간에 불과했다.

벽파는 정조가 노론 우위의 정국에 변화를 일으켜 왕권을 강화하려고 하자 이에 대한 반대를 표명한 정파이며, 시파는 청류를 앞세우는 준론탕평정책을 지지한 정파이다. 정조가 병사하고 순조가 즉위하자 벽파가 득세하여 시파에 대한 탄압을 가했으며 1803년(순조 3)에는 다시 시파가 벽파에 대한 반격을 가했다.

순조 이후 시·벽파 대립은 극단화되었다.

우의정 김달순
병인경화로 남해 유배

순조 5년 12월 벽파의 입지를 강화하려던 우의정 김달순의 시도가 좌절되면서 대대적인 옥사가 벌어졌다.

김달순은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에게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게 하여 죽음으로 몰아넣은 박치원(朴致遠)·윤재겸(尹在謙)을 표창하라고 진언했다.

그는 순조에게 사도세자의 허물을 강력하게 인지하게해 벽파의 입지를 강화하고자 했지만 반남 박씨의 이반과 순조의 반대로 실패하고 만다.

우의정 김달순은 1806년 1월 형조참판 조득영(趙得永), 대사간 신헌조(申獻朝), 정언 임업 등의 상소에 의해 사도세자를 모함하는 것이 선왕인 정조의 유지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탄핵되었다.

1월 25일 남해현으로의 유배가 결정되었고 2월 15일 강진현 신지도(薪智島)로 이배된 후 4월 13일 사사되었다.

남해로의 유배형이 내려진 지 20일만에 강진으로 이배하라는 내용이 나오는 정황으로 보아 남해에서는 20일 내외의 유배생활을 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김달순 유배와 사사과정은 다음과 같다.

1806년 1월 24일자 “금오(金吾)에서 김달순을 경흥부의 극변으로 원찬시킬 것을 아뢰었다.”

1806년 1월 25일자 “금오에서 김달순을 남해현의 절도에 안치시킬 것으로 아뢰다”

1806년 2월 15일자 “금오에서 김달순을 강진현 신지도로 이배하고 위리할 것을 아뢰다”

1806년 4월 20일자 “금부 도사 강달수가 김달순이 13일에 사사되었다는 것으로 아뢰다”

벽파는 김달순의 옥사를 통해 시파의 영수인 김조순 등에 의해 일망타진된다. 그리하여 김조순을 시작으로 하는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는 1863년 고종 즉위 때까지 60년 가까이 계속되게 되었다.

김달순은 누구인가

김달순(1760∼1806)은 정조와 순조시대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이다. 자는 도이(道而), 호는 일청(一靑). 군수 이현(履鉉)의 아들이다.

1789년(정조 13) 진사시에 합격하여 영릉참봉이 되고, 이듬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조가 인재양성을 위해 규장각에 마련된 제도인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뽑혔다.

그 후 정언을 거쳐 1792년 부수찬으로 재직 중 도당회권에서 사림을 공정하게 선발하지 않음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려 우의정 박종악, 이조판서 김시목, 참판 박우원이 도당록 지연의 책임을 지고 사직을 청하게 하는 강직함을 보여주기도 했다.

김달손은 지평, 포천 암행 어사, 사헌부 장령, 집의, 승지를 두루 거쳤으며, 1797년 6월 5일 형조참의로 재직 중 제도 옥안(獄案)의 복계(覆啓)를 지체하여 형조판서 조상진, 참판 한용귀과 함께 파면되기도 했다.

하지만 두 달만인 8월 11일 사간원 대사간으로 복직되어 형조참의, 동래부사, 진하부사, 사간원 대사간을 두루 거친 후 1800년 4월 6일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다.

전라도 관찰사 시절인 1801년(정조 8) 김달순은 전주에서 천주교를 전파하던 유항검과 그의 서제(庶弟) 유관검, 평신도 윤지헌(윤지충의 동생), 김유산, 이우집 등을 체포하였고, 유항검 형제는 밖에서 육시형(戮屍刑)을, 그 외는 교수형에 처하였다.

1802년 이조참판, 실록당상(實錄堂上), 비변사 제조를 지낸 후 1803년 형조판서, 병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승승장구하던 그는 1804년 1월 17일 순조의 동가(動駕)때에 불참하였다는 죄목으로 경기도 바닷가에 귀양보내졌지만 열흘도 되지 않은 1월 26일 다시 병조판서에 제수되었다.

그리고 3월 22일 이조 판서로 삼았으니 특지(特旨)였다. 1805년 선혜청 제조, 경기 관찰사, 홍문관제학, 호조판서를 거쳐 12월 7일 우의정이 되었다.

김달순은 우의정이 되자마자 세 번의 사직소를 올리지만 순조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입지 강화를 위해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몬 두 사람의 표창을 진언한 죄로 짧은 유배를 거쳐 사역을 받아 46세의 짧은 생애를 위리안치 된 강진현 신지도에서 마감하고 말았다

저작권자 © 남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