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여성학 '새 지평을 연다'
가부장제 비판에서 시작
새로운 문명가치 세우기

▲ © 여성신문 DB
국내에 '여성학'이 첫발을 내디딘 지 30년이 지났다. 1970년대 중반 문학, 법학, 신학, 사회학, 생리학, 사학 등을 전공하는 교수들의 노력으로 77년 이화여대에 처음으로 여성학 교양과목이 만들어졌고, 82년 이화여대 대학원에 여성학과가 개설됐다. 이후 여성학과는 전국의 대학으로 확대돼 많은 대학에서 교양과목으로 채택됐다. 2007년 현재 여성학과 석·박사 학위 과정이 있는 대학은 총 10개. 이화여대, 계명대, 효성가톨릭대, 신라대에 여성학대학원이 있고, 한양대, 성신여대, 동덕여대, 숙명여대, 서울대 등에 여성학협동과정이 마련돼 있다.
초기의 여성학은 가부장제를 들여다보고 이를 재편하는 데서 시작됐다. 이후 정치, 경제, 법, 노동 등 사회구조를 바꾸는 변혁운동, 여성의 시각에서 예술과 문화를 바라보는 문화운동, 생활 속에서 여성주의를 실천하는 생활운동으로 변모해왔으며, 최근에는 그 분야가 더욱 세분화된 상황이다. 특히 '매맞는 아내' 문제를 '가정폭력'으로, 죽은 듯이 살아야 했던 강간 피해자를 법정의 원고로 이끌어내는 등 여성들을 위한 언어와 논리, 저항 방식을 제공해 사회문제로서 드러낸 것은 여성학의 가장 큰 성과다.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여성학은 아시아 여성 연구의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2005년 세계여성학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러낼 정도로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했다.
성폭력특별법(94년), 가정폭력방지법(98년), 성매매방지법(2004년) 등 여성 관련 법령 제정, 여성채용할당제 등 고용평등 조치를 거쳐 호주제 폐지(2005년)에 이르기까지 여성계의 숙원들이 해결된 이후 여성학은 새 길을 찾기 위한 움직임이 부산하다. 88년 창간돼 지난 19년간 여성계와 함께 걸어온 여성신문은 그동안 여성학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 21세기 여성계의 새로운 흐름을 조망하며, 여성학의 새길 찾기를 모색하고자 한다.

영성페미니즘,
여성 안의 여신 일깨워 생태계 살리기

최근 여성학계는 '영성페미니즘'(Spiritual Feminism)의 가능성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영성페미니즘은 에코페미니즘과 신학이 결합된 '생태여성신학'(Eco-Feminism Theology)과 통하는 개념이지만 종교를 초월해 여성 안에 내재된 '여신'을 일깨운다는 면에서 차이를 보인다.
여성학자 박혜란씨는 "영성페미니즘은 이성과 제도로 해결할 수 없는 새로운 문명가치에 대한 기대와 열정, 희망, 에너지를 여성 속에서 찾자는 움직임"이라고 정의한다. '영성'이라는 개념은 전통적인 가부장주의 신학에서 신앙과 성령의 이름으로 여성과 자연이 억눌려 있었다는 의식에서 나온 것으로 이를 대체하기 위해 여성학자들이 사용하는 개념. 신앙하는 존재에 대한 직접적인 참여와 체험을 통해 삶의 성숙과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영성페미니즘을 연구하는 대표적인 인물은 현경 유니언신학대학 교수다. 그는 목사, 신부가 전부 남성뿐인 가부장적 종교를 비판하며 고대 여신 종교의 원형을 복원하고자 한다. '살림이스트'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내고 지혜와 자비, 정의, 사랑의 상징인 여신을 일깨워 모든 여성이 생명을 살리는 '살림이스트'가 될 것을 제안했다. 그는 또한 "행복한 여성을 만드는 페미니즘"을 주장하며,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용한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한 명상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생태여성신학은 지금 직면한 심각한 생태계 위기가 가부장적 기독교 전통에서 야기된 것이라고 비판하며, 이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촉구한다. 국내에서는 이화여대 여성신학연구소나 한국여신학자협의회 등을 중심으로 한국 여성의 종교적 삶과 영성 등에 관한 활발한 연구활동을 하고 있다. 또한 김지하 시인이 2003년부터 매년 개최해온 '세계생명평화포럼'에서도 영성페미니즘과 생태여성신학이 중요한 주제로 다뤄졌다. 신문에 독자 심리상담을 연재하고, 문화센터에서 '치유를 위한 글쓰기' 강좌를 진행하고 있는 여성학자 박미라(전 이프 편집장)씨의 활동도 영성페미니즘 실천의 한 방법으로 볼 수 있다.

▲ 에코페미니스트들의 활동 모습. 여성환경연대의 희망무역 페스티벌
에코페미니즘,
여성 풀뿌리 환경운동으로 발전

국내에서 90년대부터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여성학 분야가 '생태학'(Ecology)과 '여성주의'(Feminism)를 결합한 '에코페미니즘'(Ecofeminism)이다. 국내에 에코페미니즘을 정립하는 데 앞장서온 여성학자인 김정희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연구교수는 에코페미니즘을 '생명여성주의'라고 번역하며 "평화운동, 여성운동, 환경운동을 통합하는 개념"이라고 소개한다. "남성중심적인 이원론의 세계관을 비판하면서 생명을 가치의 중심에 놓는 만물평등주의가 핵심"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김정희 교수에 따르면 여성주의와 환경운동의 만남이 시작된 것은 80년대 개발로 생계 터전이 파괴된 현장에서 자생적인 환경운동이 발생하면서부터. 80년대 중반부터는 여성 특히 주부들이 주축이 된 공해반대시민운동협의회(86년), 공해추방운동연합 여성위원회(88년), 한국여성민우회 생활협동조합(89년) 등 여성운동단체 중심의 여성환경운동이 시작됐다.
최근 에코페미니즘을 기반으로 한 운동을 가장 활발히 진행하고 있는 단체는 '여성환경연대'다. "무분별한 개발과 자원 낭비로 위협받고 있는 지구는 인간중심적이고 남성중심적인 물신숭배가 빚은 결과이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가정, 일터, 지역 등 생활 속에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겠다"는 창립선언문은 여성환경연대의 존재 이유를 설명해준다. 99년 창립된 여성환경연대의 사업은 환경운동, 생태교육뿐 아니라 풀뿌리 교육문화운동, 아시아 여성 국제협력, 그리고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공정무역까지 다방면에 걸쳐 있다. 아시아의 가난한 여성들을 위한 생태적 일자리를 만들고, 공정한 무역과 윤리적 소비를 이루자는 공정무역은 에코페미니즘이 남녀간의 평등뿐 아니라 제1세계와 제3세계의 균형을 이루는 반지구화 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다.
에코페미니즘은 특히 새로운 여성주의 이슈를 찾던 젊은 페미니스트들의 관심을 끌었다. 20~30대 젊은 에코페미니스트들이 주축이 된 연구모임인 '꿈꾸는 지렁이들의 모임'은 자신들의 연구결과물을 담은 '꿈꾸는 지렁이들'을 펴내기도 했다. 이들은 일회용 생리대가 환경과 여성 건강에 끼치는 영향을 일깨우며 대안생리대 운동을 벌이고, 한편으로는 새만금 여성들을 재조명했다. 또한 여성의 눈으로 본 에너지 위기와 대안을 모색하고, 산업재해를 여성주의 입장에서 분석해 여성노동자의 새로운 권리를 밝혀내는 등 다양한 연구를 진행했다.
그러나 에코페미니즘은 현장의 활발한 여성환경운동과는 별도로 이론적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어 아쉬움이 남는다. 김정희 교수는 "한국의 역사적, 문화적 현실에 기반한 이론정립이 앞으로의 중요한 과제"라고 지적했다.

▲ 에코페미니스트들의 활동 모습. 대안생리대 운동을 벌이는 월경 페스티벌.
문화분석,
생활 속에서 여성주의적 시각 찾기

여성학적 문화분석은 여성학을 별개의 세계로 생각하는 일반인에게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다. 최근 젊은 여성학자들의 논문을 살펴보면 생활 속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대중문화를 여성학적 시각으로 분석한 주제들이 눈길을 끈다.
이런 흐름은 지난 6월 열렸던 한국여성학회 제23차 춘계학술대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처음 신설된 대학원생 분과에서는 '동방신기'를 좋아하는 여성들의 심리를 분석한 '30대 기혼여성의 팬덤과 나이의 문화정치학', 여성 자기계발서 유행현상을 다룬 '성별화된 자기계발 담론과 여성 주체' 등이 주목을 받았다. 또한 영어 콤플렉스와 해외여행 욕망에 시달리는 '고학력 여성들의 글로벌 욕망과 불안에 관한 연구', 된장녀 논쟁과 골드미스들의 생활패턴을 분석한 '20, 30대 고학력 싱글 직장여성들의 소비의 정치학', '한국 여성의 자유배낭여행 경험을 통해 본 주체성 변화에 관한 연구' 등도 젊은 여성학자들에게서 발표됐다. 이상의 주제들은 거시적인 여성학 담론보다 자신들이 경험하고 있는 삶과 문화의 트렌드를 여성의 시각으로 분석하려는 최근 여성학의 경향을 보여준다.
오자영(이화여대 여성학과 대학원)씨는 아이돌 스타에 열광하는 30대 기혼여성들의 팬덤현상을 분석하면서 "30대 기혼여성이 10대 위주로 구성된 팬덤·대중문화의 새로운 소비층이자 주체로 떠오르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결혼 후 사회와의 단절로 인한 고립감에 빠지기 쉬운 전업주부들이 아이돌 스타에 대한 팬덤을 통해 자신만의 문화영역을 확보하는 한편, 온라인 팬 네트워크를 통해 세상과 소통한다"고 설명했다.
정가영(연세대 사회학과 석사)씨는 한국의 20, 30대 싱글 여성들 사이에서 적극적으로 소비되고 있는 여성 대상 '자기계발서'의 논리를 분석했다. 그는 현재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여성 자기계발서가 "세속적 성공에 대한 욕망과 여성으로서의 자존감 사이에서 실질적으로 이익이 되는 가치관만 수용하라"고 요구한다면서 "이때 여성의 외모, 몸, 여성스러움을 무기로 사용하라고 부추기고 있어 기존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로의 후퇴를 가져올 위험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대중문화를 여성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여성학적 문화분석은 미디어 세대인 차세대 여성학자들에게서 꾸준히 시도될 것으로 전망된다.

■ 한국 여성학 연구의 어제와 오늘

여성학자들의 최대 연구단체인 한국여성학회의 최근 5년간 연간 학술대회 주제를 통해 국내 여성학 연구의 흐름을 알아본다.

한국여성학회 최근 학술대회 주요 주제

2003년 탈권위주의 시대의 여성주의 정치학
2004년 성과 차이의 정치학
2005년 지구화 시대의 한국 여성주의
   한국 여성학의 외연 확장을 모색하며
2006년 한국여성학의 다변화와 지식소통의 과제
2007년 여성학의 쟁점과 젠더질서의 재편

출처 : 여성신문 박윤수 / 여성신문 기자 (birdy@wome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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