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군내에는 문화재로 잘 알려져 있지만 정작 제대로 잘 아는 이는 없고, 밖으로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주민들 중 모르는 이는 거의 없는 유·무형의 소중한 문화재와 전설 등이 많다. 이에 남해를 진정한 보물섬으로 만드는 소중한 우리의 재산을 찾아 함께 알아가고자 한다. 나아가 더욱 잘 가꾸고 지키기 위한 노력도 기울여보자. <편집자 주>

 

밑줄 쫙!


대국산성은…

대국산성은 설천면 진목리 대국산 정상에 있는 둘레 약 530m, 성벽의 높이 약 4m, 너비 2m의 성으로 지난 1974년, 학술연구자원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경상남도 기념물 제19호로 지정됐다.

산 정상을 둘러싸는 형태 즉, 테뫼식 성의 형태를 보이고 있으며 정확한 축성 시기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고, 삼국시대다, 고려시대다 하는 의견만 분분하다.

성은 20∼30cm 크기의 자연석과 내부에는 흙과 자갈 등으로 메워 직선형으로 쌓아올린 것이 산 정상을 타원형으로 둘러싸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에 고현산성을 가리켜 “현의 북쪽 17리 지점에 있으며, 석축으로 둘레는 1740척(527m)이고 높이는 10척(3m)이다”라는 기록이 남아있어 이 대국산성이 고현산성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낳았다.

이에 따라 대국산성 복원 및 개발 사업이 계획됐으나 향토사학자에 의해 고현산성의 역사적 자료와 대국산성에 대한 역사적 사실이 다르고, 대국산성에 대한 명칭에서부터 의문이 제기돼 복원·개발 계획은 사실상 백지화된 상태다.

대국산성에는 ‘천 장군과 일곱 시녀’에 대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전설의 내용이 각 문헌이나 자료에 따라 상이한 내용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대표적인 이야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 경종 때 천씨 성을 가진 장수가 일곱 시녀와 성 쌓기 내기를 했는데 일곱 시녀가 저녁밥을 짓는 동안 천 장군은 성을 쌓기로 하고 누가 먼저 끝내는지 경합을 벌이게 된다.

일곱 시녀가 밥을 짓기 시작하자 천 장군은 산허리에 올라 바다 쪽을 향해 부채질만 거듭하고 있었다.

일곱 시녀가 승리를 확신할 때쯤 바다 속에 있던 돌들이 날아와 비처럼 내리더니 순식간에 성이 완성돼 천 장군이 이겼다는 전설이다.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성 축성 연대와도 맞지 않으나 전설과 연관이 있다는 제사터가 발견되고 성을 이룬 돌들에서 굴·조개 껍질 등이 보여 옛 이야기에 재미를 더한다.


대국산성은 지금


정확한 역사적 고증작업 시급

대국산성은 그 명칭부터 잘못 불리어 현재 알려진 여러 사실들과 역사적 진실 사이에 많은 괴리가 존재한다는 지적이 있다.

실제로 현재 남해군지도에 표기된 대국산의 한문 표기는 大局山으로 일제 시대였던 1916년부터 오늘까지 사용되고 있다.

구한말이었던 1911년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에서 발행한 한반도 지형도에 대곡산(大谷山)으로 표기돼 있던 것이 수정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의 대국산성(大局山城)은 이 시기 지도의 대국산(大局山)에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974년에 제작된 우리나라 해동지도 영인본에는 대국산 즉, 大國山이라 표기돼 있어 대국산성의 한문 명칭이 일제에 의해 잘 못 표기됐음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팔만대장경과 남해와의 관계에 대해 연구 중인 향토사학자 정상운씨는 대국산(大國山)의 명칭에서 팔만대장경 판각지로서의 흔적을 발견해내고 있다.

그는 대국산성이 원래 대국성으로 불려졌을 것이라 확신하며 산성과 성의 차이점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즉 오랑캐의 침입에 대비해 축성된 산성이라면 보다 전시에 마을 주민들과 군인들이 거주하며 전쟁에 대비할 수 있도록 현재 성보다 규모가 더 커야 하며, 우물터나 샘이 존재해야 하고 식량창고와 취사의 흔적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대국산성에는 현재까지 물을 저장하는 물탱크 기능의 인공연못터가 발견되고 있으나 이는 물이 샘솟는 우물이나 샘의 기능은 아니라는 것.

대국산성이 아니라 대국성이라면 대국의 지명으로부터 팔만대장경 판각과 관계가 있는 기구인 ‘대장도감분사국자감성’으로 거슬러올라갈 수 있다고 정씨는 주장하고 있다.

이 명칭으로부터 대국성이 도출되고 대국산 역시 여기서부터 비롯됐다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라면 고려시대 국가의 중요기구인 대국성이 남해에 존재했었고 이로부터 팔만대장경의 판각이 이루어졌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와 같이 현재 대국산성은 명칭에서부터 역사적 진실과 그에 따른 의미까지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과연 진실이 무엇인갗하는 의문에 대한 답을 기다리고 있다.

1974년 도 지정 문화재로 등록되면서부터 잘못된 명칭이 공식적으로 널리 쓰이게 돼 이를 바로잡는 움직임이 일단 시급한 것으로 보인다.

남해군 담당자는 “명칭에 대한 잘못된 표기에 대해 들은바가 없고 다만 가능한 한 빠른 시일 내에 대국산성의 지표조사와 발굴작업을 위한 예산을 신청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향토사학자들과 내외의 역사학자, 행정이 대국산성의 진실에 대해 공론화하고 앞으로의 연구 방향을 바로잡을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한편, 대국산성은 지난 1988년 성 둘레의 수목을 제거하는 정지작업을 한 바 있고, 1996년부터 2001년까지 성곽 보수가 이루어져 왔다.

또 지난 2001년 시행된 석축 정비 및 남문지 성지 발굴 작업에서 성내에 건물·연못 터, 네모꼴의 망대로 보이는 석축 등이 발견됐으나 발굴 예산이 부족해 작업이 중지됐다.

지난해 여름에 발발한 태풍 에위니아로 성벽이 무너져 긴급보수사업으로 12월부터 올해 초까지 복구 작업이 있었다.



조 기자 대국산성 만나러 갑니다


덤불 가시가 감춰버린 진실


정상운씨로부터 대국산성과 팔만대장경과의 관계가 밀접하다는 설명을 듣고 나니 뒷목이 뻐근해진다.

어렵고 복잡한 역사 수업이었으나 신기하고 솔깃한 것이 썩 재밌었다.

기존의 학설이나 알려진 바와 다르다고 해서 새로운 학설을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17세기 절대왕정 시대에도 부끄러워해야 할 학자의 자세다.

정상운씨의 설명이 그저 개인의 추론이라 하더라도, 정확한 문헌과 자료, 기록에 근거한 것이므로 학계나 향토사학자들 사이에서 신중히 논의될 여지는 있어 보인다.

행정에도 수년간 몇 번인가 민원을 제기하고 자료를 제출했는데도 어느 책상 서랍에서 잠들었는지 오리무중이란다.

“선생님, 이 만큼 실한 자료를 토대로 주장하고 있는데 어째서 이 화두로 전면에 나서지 않으시는가요?”

“내가 박사 학위가 없기 때문이지요”

“없는 사실을 지어내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기록이 있는데도 말입니까?”

“내가 일개 군인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문헌이 이렇게 확실한데요?”

“내가 아직 젊기 때문이에요”

우문우답이랄지 동문서답이랄지를 반복하고 필자는 대국산성 아니 ‘대국성’으로 향했다.

대국산성은 거친 가시덤불이 가득 뒤덮여 그 안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무엇이 존재하는지에 대한 사실은 깊은 암흑 속에 감춰져 있었다.

기존의 학설들과 주장들이 가시덤불이 돼 낯선 학설에 날을 세우고 접근을 허락지 않는 것처럼.

학자의 기본 덕목인 ‘개방성’과 행정의 기본 덕목인 ‘민원 해결성(?)’이 아쉬운 한 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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