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경(大藏經)이란
대장경이란 불경(佛經), 즉 부처님의 말씀을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것이며 불제자(佛弟)子들이 지켜야 할 윤리의 조항과 공동생활상의 규범인 부처님의 근   본교리(根本敎理)이다.

대장경이 우리나라 역사상 고려시대에 제작되었기 때문염고려대장경”이라 하고 경판수가 팔만여장(81,258)으로 팔만대장경이라 하며 이름하여 “고려팔만대장경”이라 한다. 또한 해인사(海印寺)에 봉안(奉安)되어 있기에 “해인사 팔만대장경”또는 “해인사 고려대장경”이라고 부른다.

1236년(고종23년)에 판각(板刻)하기 시작하여 1251년(고종38년)까지 16년만에 완성된 현존하는 대장경판 중 여러차례 교감(校勘 비서성에두었던종9품벼슬)을 거친 가장 완벽하고 글자 하나하나가 일률적으로 매우 정교하여 세계최고의 경판으로 손꼽히고 있다.

국보(國寶) 제32호(1934.8.27일제시대조선총독부가 지정한 것을 우리정부수립 후 1962.12.20대한민국 정부가 다시 지정)로 총 81,258매, 경판1매당 글자수 644자, 경판전체 글자수 52,330,152자, 경판나무는 자작나무, 산 벚나무, 돌배나무, 후박나무 등 재질이 단단하고 오래 보존할 수 있는 목재를 선택하여 바닷물이나 갯벌에 침하시켜 그늘에 말림을 반복하여 뒤틀림방지, 쪼갬(틈 생김)방지, 좀 방지 등 장기간 보존을 위해 체계적인 과정을 밟는다.

우리나라 대장경판의 역사
1. 초조(初雕) 고려대장경
최초의 대장경판은 1011년(고려현종2년)에 시작하여 1029년(현종20년) 18년만에 완성한 초조대장경으로 대체로 북송(北宋 중국송나라태조부터흠종까지)의 관판대장경(棺板大藏經 넓고긴널판지에판각)의 내용을 토대로 조성하여 대구 팔공산 부인사에 봉안하였는데 1232년 몽고군의 침략으로 소실되었다.

2. 재조(再雕) 고려대장경(현존하는 고려팔만대장경)
초조대장경이 몽고군의 침략으로 소실된 후 4년째인 1236년에 시작, 16년 후 1251년에 판각이 완료되어 강화도 선원사에 봉안했다가 서울 지천사를 거쳐 1398년 합천 해인사로 옮겨져 지금까지 안전하게 봉안하고 있다.

3. 고려대장경 판각 동기(動機)
불교가 국교(國敎)인 고려시대 불경(佛經 대장경)을 잘 모시고 기리 보존하기 위해 나무에 판각하면 부처님의 위신력(威神力 부처의영묘위엄고귀함)에 의해서 왕조(王祖)가 유구(悠久)하며 나라가 평화롭고 국민이 평안해 진다는 숭고한 믿음으로 전쟁 중에도 고려인들이 일치단결하여 이 엄청나고 불가사의(不可思議)한 팔만대장경 판각을 이룩하였다. 오직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호국(護國), 국민을 편안하기 위하여 호민(護民), 불법(佛法)을 보호하기 위한 호법(護法)을 말한다.

4. 고려대장경 판각시기와 장소
판각은 대장도감(大藏都監)이나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에서 준비기간과 함께   1236년에 시작했으나 대장도감에서 뿐만 아니라 분사대장도감에서 판각한 판이 상당수에 달하나 적어도 1243~1248년 동안의 분사도감 판각이 이시기에 가장 활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판의 판각은 강화도(江華島)에 있었던 대장도감 본사(本司)와 남해도(南海島)에 있었던 분사(分司)에서 담당하였으며 종경록(宗鏡錄)은 1246~1248년까지 남해분   사도감에서 개판해 낸 것으로 판면의 형식이 원장(原藏)과 같다.

 분사를 남해도   에 둔 것은 강화의 도읍과 같이 불의의 외침을 피한 것과 경판용 목재인 후박·박달·산벗나무 등의 재료가 섬 지방에서 많이 생산되고 육지보다 해상 수송이 용이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이 분명히 1247년(정미년丁未年) 정미세고려국분사남해대장도감개판(丁未歲高麗國分司南海大藏都監開板)이라 하여 분사가 남해에 있었음이 뚜렷하게 표시되어 있다.    
 
정 안(鄭晏)
정안(? ~ 1251)은 고려의 무신, 본관은 하동(河東), 초명은 분(奮), 자는 화경     (和卿), 형부상서 세유(世猷)의 손자로 평장사 숙첨(叔瞻)의 아들이며 최우(崔瑀)의   생질이다.

총명하여 어려서 과거에 급제하였고 음양(陰陽), 산술(算術), 의약(醫    藥), 음률(音律)에 정통하였다. 진양의 수령(首領)이 되었으나 어머니가 연로(年老)  하다는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인 하동(河東)에서 어머니를 봉양하기도 하였다.

정안은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에 이어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올랐으나 최항이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것을 비판하다가 백령도에 귀양 후 살해 되었다.

정안은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신라원효대사의대승의진리를논한책3권1책목판)의 간행자(刊行者)로서 최이의 처남으로 남해에 사는 동안 간경(刊經)에 종사하면서 1244년에 간행한 것으로 ‘법계도’(法啓導)와 같은 판식의 소형본인 점에서 대장도감분사에서 개판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1. 팔만대장경제작 정안(鄭晏)과 일연(一然)의 관계
삼국유사(三國遺事) 작자 일연(1206~1289년 승려·학자, 정안과 함께 팔만대장경사업에 참여)의 인각사(경북군위군고로면화수동)비문에 기유년(己酉年 1249년) 정안이 남해에 있는 그의 개인집을 내 놓아 절을 만들고 정림사(定林寺 고현면오곡리뒷산추정)라 하였다. 주지가 되어 그리고 스님들을 청하여 그 곳에 주석(駐錫)(入山安住)케  했다.

정림사는 개인의 원찰(願刹)만이 아니라 정안이 대장경간행사업과 긴밀히 연     관되어 진다. 최근 한 학자는 현재 해인사에  봉안된 팔만대장경이 강화도의 대장도감에서 판각된 게 아니라 분사도감에서 만들어졌다고 하며 분사는 남해(南海)에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팔만대장경에도 분명히 분사도감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또한 제작처를 분사도감이라고 새긴 판각 가운데는 지명으로는 남해(南海)가 유일하다(정미세고려국분사남해대장도감개판).

남해 분사도감과 정안의 정림사와의 관련성을 유추해 보면 정안은 불사 특히 대장경조판에 심혈을 기울여 제작비의 반半을 제공했다는 사실과 정림사가 연관 지워진다는 것은 몽고의 외침을 불교의 힘으로 난관을 타개하려 시작한 대장경판각사업이 완성된 1251년은 정안이 일연을 정림사로 초대한 2년후 의 일로 대장경 판각의 중추적인 역할을 맡고 있는 이 절(寺)은 정안과 일연(1251년 대장경판완성대법회주재(大藏經板完成大法會主宰)의 관계를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다.

위에서 기술(旣述)한 바와 같이 고려 팔만대장경과 정안의 관계는 삼국유사, 고려사(高麗史)에 얽힌 비밀들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고려팔만대장경이 남해에서 판각되었다는 흔적은 경판 81,258매중 종경록 권27권 말미에 “정미세고려국분사남해대장도감개판”이라는 간기(刊記)가 증명해 주고 있지 않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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