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길 호 보물섬스마트관광택시 기사
정 길 호
보물섬스마트관광택시 기사

땅거미가 질 저녁 무렵, 남해읍공용터미널 택시승강장 순번 대기 중 잘생긴 미모의 외국 여성 한 분을 모시게 됐다. 훤칠한 키에 아름다운 목소리로 “삼동면 독일마을로 가 주세요”라고 했다. 여행용 가방을 차량 뒤쪽 트렁크에 넣고 차 안으로 안내했다. ‘한국어를 잘하시네요’라고 하면서 ‘어느 나라에서 오세요?’라고 질문을 던졌더니 “독일에서요”, ‘긴 시간 여행이라 많이 피곤하시겠어요. 20분가량이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해 주면서 ‘마음 편안하게 잘 모시겠습니다. 그런데 손님, 숙소는 예약하셨나요?’ 물었더니 “저는 어머니가 살고 계시는 어머니의 나라에 왔습니다”라고 했다. 

이번에 처음 한국을 여행하는 초행길이라 그런지 긴장하는 모습이었으며 인천 공항에 내려 서울을 경유해 남해로 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동안 어머니가 무척 보고 싶고 그리웠다면서 어머니께 한국어를 배웠는지 발음도 정확하고 유창했다. 과거 파독 간호사를 지낸 분의 따님이고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미혼 여성이었다. 나는 운 좋게 귀한 손님 한 분을 만나게 된 것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대화를 나누면서 긴장하지 않게 최대한 노력을 했다. 한국에 대해 무척 관심이 많았고 궁금한 점도 많았다. 나는 가이드 역할을 하면서 과거 우리나라의 실상과 파독 광부, 간호사에 대해 설명을 해 주었다. 또 독일마을이 생긴 유래와 파독전시관 등 독일에서 한국의 광부, 간호사들이 근무할 때 사용했던 병원 의료기구 일체와 작업 도구 그 외 각종 사진 등을 고스란히 독일에서 가져와 전시해 놓았으니 감명 깊고 좋은 투어(여행)이 되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헤어지는 순간 내 마음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아련한 옛날의 추억 속으로 스며들어 가고 있었다. 남의 일 같지 않게 눈물 나는 시간이 된 것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다시금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과거 60 ~ 70년대 독일로 떠난 우리 근로자들은 한국에 귀국한 사람들이 더 많았지만, 그곳에서 국적을 취득하고 결혼해 독일 교민으로 남은 사람들도 있었다. 긴 세월이 흘러 우리나라 최초로 삼동면 물건리 야산을 개발하여 90,000㎡ 부지를 만들어 2022년도에 택지를 분양받아 독일에서 직접 건축자재를 운반하여 전통 독일양식으로 건축을 했다. 현재 독일마을에는 44가구에 77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 독일마을이 탄생한 이후 유명한 드라마 촬영지가 되었다. 환상의 커플, 국제시장, 배우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 등 다양한 장르의 무대 배경이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70년 전 한국전쟁이 터져 3년 동안 밀고 당기고 하였지만, 아무것도 얻은 것 없이 한반도 전역이 폐허가 되고 수많은 사상자만 남긴 채 세계 최빈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먹을 것이 부족하고 각종 질병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 갔고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전쟁에서 다친, 팔다리가 없는 장정들은 목발을 의지 삼아 집집마다 양식을 얻으러 다녔고 나병환자(문둥이)나 절의 스님도 마찬가지로 민생고를 해결하기 위해 남의 집 대문을 두드려야 했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나라를 바로 세우기 위해 고군분투 안간힘을 썼다. 1960년대 1인당 국민소득 76달러, 실업률 30% 남짓, 초연이 채 사라지지 않은 긴박한 전쟁위기 상황에서 희망이 있다고 독려하며 외화를 벌어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거쳐 남자들은 탄광으로, 여자는 간호사로 이역만리 선진국 독일이라는 보내졌다. 지하탄광 1200m 갱도에 들어설 때마다 느꼈을 생의 절박함, 매일 아침 꼭 살아서 돌아오라는 간절한 외침을 품고 매일매일을 반복되는 중노동 속에 살아야만 했던 사람들, 글뤽 아우프! 살아서 돌아오라는 뜻의 독일어이다. 이 아침 인사는 그리운 고향 가족 그리고 자신과의 약속이었다. 삶의 애환, 그 속에서도 단 한 순간도 잊지 않았던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간절함을 담아낸 공간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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