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의 일입니다. 밭에서 일하다 뒤로 돌아가려고 허리를 돌리는 순간 툭 하는 소리와 함께 순간적으로 통증이 엄습해 왔습니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생긴 일이다 보니 움직일 때마다 쪼여오는 통증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습니다. 거의 한 발짝도 움직이질 못할 정도로 엄습해오는 통증에 자괴감이 들 정도입니다. 

겨우 몸을 추스른 후 편편한 돌덩이에 앉아 심호흡을 하며 조금 전 어떤 상태였는지를 되돌아봅니다. 그냥 무방비 상태에서 다음 동작을 잇는 순간의 행보에 방심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아니면 생각을 다른 데 두고 있다가 정작 하던 일에 집중할 의식을 빼앗기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어쨌든 무방비나 무심의 상태로 있다가 갑자기 당하는 고통이 얼마나 큰지를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아픔의 원인은 대개 몸의 상처나 근육 이상 등에서 오기도 하고 정신적 고통이나 정서적 혼란에서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몸의 경우를 보면 극히 작은 외상에서도 통증이 유발되기도 하는데 어떤 때는 아주 작은 가시에 손가락이 찔려도 그 순간의 고통으로 온몸이 힘들어지는 것을 보면 작은 것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라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몸의 통증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흔히 우리는 아주 사소한 동작 하나라도 그것이 움직여지기까지에는 수많은 작용이 연결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곤 합니다. 그것이 몸의 외부든 내부이든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차원에서 인체를 이루는 몸과 마음, 성품도 이와 다를 바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분명한 것은 아픔을 통하여 몸에 대하여, 아픔에 대하여, 마음에 대하여 다시 한번 살펴보는 기회를 갖게 된다는 점입니다. 

요즈음 멘탈 헬스(mental healths) 즉 마음의 건강에 관해 관심이 높아져 가고 있습니다. 아픔의 직접적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살피기 시작한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거의 마음의 문제에 둔감한 체 몸 내외부의 원인에만 초점을 맞추어 오고 있었다는 것이 주지의 사실입니다. 아픔이 유발된 병증의 원인이 발생한 마음의 질환에 대해서는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마음을 통하여 정신 건강에 새로운 비전을 제시할 수 있다면 점점 복잡해져 가는 현대인의 심리를 치유할 적절한 방책이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가짐을 바꿈으로써 몸을 바꿀 수 있다는 것으로 명상도 이러한 영역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아픔이란 것, 그것이 몸이든 마음이든 우리는 이 아픔을 통하여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또는 이런 일을 통하여 내가 고치거나 개선해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를 되돌아보기도 합니다. 특히 병증세가 악화되어 오랫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다 보면 지난날 활동하던 모습들이 주마등처럼 스치며 회환에 젖기도 합니다. 

한편으로는 아쉬움을 달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 했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참회의 심경을 담기도 합니다. 어느 측면에서 보면 몸이나 마음이나 아픔이 있어야 한층 성숙해진다는 점에서 명나라 묘협 스님의 보왕삼매론은 귀감이 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몸에 병 없기를 바라지 마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병고로써 양약으로 삼으라.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기를 바라지 마라.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으면 업신여기는 마음이 생기나니, 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 

심신을 추스르는 과정에서 나약해질 수 있는 마음을 바로 잡기 위한 선각자의 말씀을 떠올리며 스스로 겸허히 낮추면서 긴급 처방을 해보기도 합니다. 병원에 물리 치료를 받기 위해 외과를 갔다 오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할머니 두 분을 만났습니다. 생면부지의 할머니들은 필자의 곁을 지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프지 않고 이렇게 걸을 수 있는 것만 해도 참으로 다행이고 감사한 일이야!” 아프면 어떻노, 그냥 모든 게 귀찮고 짜증날 뿐이지, 아프지 않고 일할 수 있다는 거, 움직일 수 있다는 것 이게 복이 아니고 뭐람. “암 그렇고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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