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동 규고려대 명예교수
김 동 규
고려대 명예교수

죽음에는 순서가 없다고 하지만 최근 들어 주변에 계셨던 몇 분들의 죽음을 대하면서 아쉬움과 함께 허전한 심정으로 생전의 그분들의 모습을 그리면서 이 글을 쓴다.

지난 1월 28일에는 운주 정범모 교수님의 부고를 접하였다. 운주 선생님은 서울대 사범대학 교육학과에서 후학을 양성하다가 충북대 총장과 한림대 총장을 거치면서 한국교육학회에 독보적인 위치에서 수많은 후학들을 배출한 분이다. 전국의 초중고 교사들이라면 그가 1980년대에 쓴 <교육과 교육학>이라는 명저를 대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1968년 12월 5일에 박정희대통령에 의하여 반포된 <국민교육헌장>의 기초위원으로서 지금 읽어도 뛰어난 명문을 작성한 중심인물이었다. 

그는 1962년 미국 시카고대학 유학중 교육학의 세계적인 석학 밑에서 박사학위를 단 2년 만에 끝내고 귀국할 정도로 두뇌가 명석한 분이었다. 한국교육과 교육학에 과학적인 방법론을 도입한 선구자였다. 필자와의 인연은 대학원에서 만난 학생과 교수의 관계였다. 

다음은 지난 2월 26일에 별세한 이어령 교수님이다. 우리들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한국지성사에 우뚝 솟은 학자이며 문인이고 예술인이다. 그의 언어감각과 표현은 시대를 초월하였다. 88 서울올림픽 개막식에 연출한 ‘굴렁쇠 소년’은 올림픽 역사에 길이 남을 그의 업적이며 이화여대 교수로 봉직하면서도 초대 문화부장관도 역임하였고 무엇보다 2008년의 <흙속에 저 바람 속에>라는 초기작품은 지금 읽어도 새롭게 다가오는 것으로 우리민족의 정서를 피부로 느끼게 하는 내용이며 또한 일본과 일본인들의 특성을 6개의 특성으로 나누어 압축한 <축소지향의 일본인>은 출판당시 일본의 지성계를 놀라게 한 명작으로 한국의 위상을 드높인 글을 쓴 분이다. 당시 필자는 일본에서 공부하고 있었는데 고인의 저서로 일본열도를 마치 후쿠시마 지진처럼 뒤흔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의 죽음은 국보를 잃어버린 것처럼 아쉽고 그리울 뿐이다.

끝으로는 지난 3월 8일에 별세한 이재원 교수님이다. 그는 함양의 이씨종가 종손으로 태어나 서울대를 마치고 미국에서 학위를 끝내자 모교인 클리브랜드 주립대학에서 30여 년간 교수와 학장직으로 근무하다가 귀국하여 우리 남해의 설천면 금음리 옥동의 바닷가에 집을 짓고 의사인 부인과 함께 정착한 분이다. 부잣집 맏아들답게 키도 크고 말수도 적으며 인물이 출중한 선비 스타일이었다. 그의 아버지도 박정희 대통령과 같은 해에 대구사범 출신으로 경남교육감을 지냈으며 박통이 경남에 올 때는 꼭 그를 찾았다고 한다. 얼마든지 교육부장관도 할 분이었지만 본인은 지방의 교육책임자로 남았던 훌륭한 인격자였다.

필자와의 인연은 2010년 당시 정현태 남해군수님의 소개로 만난 뒤부터는 거의 매일 교류하였고 마침 그 무렵 결성된 남해출신 교수들의 모임인 <보물섬남해포럼>과 그 이후에 출범한 독서모임 <아름다운사람들>의 회원으로 가입하여 새로운 선진 정보와 지식을 우리들 회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는 오랜 미국교수생활에서인지 항상 CNN과 같은 외국방송을 들었고 독서모임에서도 원서로 된 작품을 읽고 발표를 하였다. 지금도 그가 추천한 피츠제럴드의 유명한 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영문원서로 읽고 와서 독서회원들에게 들려 준 것이 새롭게 떠오른다. 

오랫동안의 병고에 시달리고 있을 때 우리 회원들은 모두 그의 회복을 기원하면서 독서모임에 다시 나오기를 고대하였지만 운명의 여신은 끝내 그를 데리고 갔다. 이어령 교수는 임종을 앞두고 죽음을 ‘돌아 가셨다’고 하는 우리말은 태어난 곳으로 되돌아간다는 의미라고 했다. 

태어나고 죽는 것은 인간의 숙명이지만 남은 사람들은 먼저 떠난 사람들을 항상 아쉬움으로 마음속에 담게 된다.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하직하는 이분들의 운명(殞命)의 자리에 없었기 때문에 지금도 나에게는 머릿속에 살아 계시는 분들이다. 떠난 자리가 클수록 아쉬움은 더 넓고 더 깊다. 박목월 시인의 ‘아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라는 노랫말이 새로울 뿐이다. 삼가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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