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군 이동면에는 유독 많은 금석문들이 산재해 있다. 중요한 것만 골라도 30여점이 넘는다. 하나하나가 우리 남해의 역사와 변화를 되새겨 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들이다. 남해사람들의 과거 삶이 한국사라는 지평에서 본다면 소소할지 몰라도 우리 남해로서는 귀중한 보석이다. 이런 역사자료들을 잘 보존하고 그 내용을 찬찬히 살펴 남해의 역사를 기록할 때 곳간의 소중한 알곡을 꺼내듯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

남해읍에서 19번 국도를 따라 이동면으로 들어서면 남해마늘연구소 도로 맞은편에 꽤 넓은 저수지가 보인다. 가뜩이나 물이 귀한 남해의 농토에 젖줄 같은 용수를 대주는 연못이다. 이름이 ‘장평소류지’다. 지금이야 저수지도 많아졌고 지하수를 길어 농수로 쓰는 시대지만 하늘만 보며 농사를 짓던 천수답 시절에는 저수지만큼 긴요한 시설은 없었다. 그런 장평소류지는 언제 만들어졌을까?

장평소류지의 역사를 알 수 있는 비석이 소류지 동쪽 제방 한가운데 서 있다. 초곡 장평저수지류지 기공비(草谷 長評貯水池溜池起功碑)가 그것이다.

장평소류지가 처음 조성된 때는 1807년(순조7) 봄이다. 현령 채익영이 주민들의 불편을 해소하고자 착공을 지시해 관개(灌漑)에 쓰도록 했다. 1914년 3월 준설공사가 이뤄졌고, 군수 서기원이 상황을 개탄하면서 소작인들을 동원해 돌을 캐어 제방을 쌓아 넓혔다. 7년 뒤인 1921년과 8년이 지나 1929년 증수했고 다음해에는 대대적인 제방공사를 펼쳤다. 1951년 전후해서 보강공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공비에 여러 사람의 이름을 나오는데, 구민 이시봉 선생 등이 참여해 4월 6일부터 6월 20일까지 총 9000평에 달하는 주변공사가 진행되었다. 당시 부산일보 기사(1950년 1월 6일자)에 의하면 이시봉 선생은 전년인 1949년 12월 30일 남해향교 명륜당에서 열린 유림회원대회에서 사회를 봤던 것으로 나온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보완공사가 이어졌을 것인데 지금 우리가 보는 소류지는 기원이 214년 전으로 올라가는 것은 분명하다. 하나의 저수지라고 해도 이처럼 장구한 시간 많은 이들의 노력과 관심으로 현재에 이르렀다. 기록은 손상되거나 감춰질 수 없다. 장편소류지 기공과 보완공사에 참여했던 이들의 공로를 남해주민들은 잊지 않았다. 공덕비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홍 이시봉 선생 공덕 기념비>
- 1883년 1월11일 초음(월구산)마을에 태어난 선생은 기골이 장대하고 인물이 출중 향리에서 인광이 높았다. 일찍이 염전사업과 정미소. 양조장 사업으로 부를 이루어 건너 이동 다초에 야전학교(현 다초초등학교)를 설립, 광복 이후 남해군 향교 전교로 유림에 기여와 노량 충렬사의 돌계단 조성도 하였다. 1932년 장평소류지(새민못)에 많은 전답을 기부 넓고 깊게 조성하여 둑에는 왕벚꽃나무를 심고 아래까지 마을길을 넓혔다. 이로 인해 농사를 풍요롭게 하였고 수로에는 빨래터를 마련 생활환경에 도움되게 하였다. 장평소류지 벚꽃은 푸른 강진바다를 배경 삼아 한 폭의 그림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며, 장평소류지(새민못)는 제일 아름다운 곳으로 1960년대까지 초, 중학교 졸업 소풍을 가던 곳이다. 이시봉 선생은 이미 이때에 새마을 운동을 개척한 선구자이시며 많은 선행을 베푼 정신을 기리며 그 공덕을 새겨서 남긴다.

고(故) 이시봉 선생의 손자인 이환성 단양관광호텔 회장은 “1950년 6·25 당해에 아버지(이청옥)는 남해공립 농업중학교(5년제, 현 남해중·제일고)의 교감으로 재직 중 진주공립 농업중학교 발령을 받았으나 조부께서 위험한 시기라며 만류해 교직을 사퇴하고 비누공장을 운영하다가 수제자 중 강창호(전 재경향우회 회장) 등과 납치되던 중 강 회장은 도피하였다. 구속 중 제자들에게 먹을 걸 나눈 탓에 허기에 지쳐 함께 하지 못하고 이북으로 끌려가던 중 지리산 입구에서 추석날 운명하셨다”고 한다. 이 회장은 “강창호씨 등 제자들이 매일 아버지 빈소를 찾아 울부짖던 기억과 아버지 상여에 달린 종을 쳤더니 동네분들이 웃기에 다시 쳤더니 울던 모습도 생각난다”고 회고했다. 이환성 회장은 우리 최대 명절 추석을 맞아 모든 사람들은 즐겁게 고향을 찾았을 때에 아버지 제사 지내려 남해를 다녔다 한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노량 충렬사 돌계단 입구에는 이시봉 선생 기록도 있었다. 이때부터 이환성 회장 집안은 노량(이순신 장군)과는 인연이 있어 고(故) 신동관 전 국회의원께서 남해대교의 대역사를 이루면서 국도(제19호) 승격과 이락사, 충렬사를 사적으로 승격시켜 국비로 관리토록 하여 오늘날 ‘이순신 순국공원’으로 이어져 왔다. 이환성 회장은 “당시 조부님께서 유독 어린 나를 트럭에 태우고 노량 충렬사 계단공사 현장에 매일 데리고 다녔는데 아마도 일찍 아버지를 잃은 나에게 올바른 정신을 심어주려 한 것 같다”고 한다.

그는 또 “사촌매형 신동관 의원의 남해대교 건립과정을 지켜보았기에 노량과 이순신 장군에 대한 애착이 남달라서 임진왜란 때 관음포에서 전사한 명나라 부총통 등자룡 장군 유허비에도 관심을 쏟고 있다”고 하였다.

한편 신동관 의원 그늘에 묻혔었지만 이환성 회장의 외증조부는 1910년 4월 지금의 이동초등학교 전신인 사립동명초등학교 설립자 최효석 선생이다. 대마도에 끌려가 순절한 면암 최익현 선생의 수제자이다. 외조부 최익수 선생은 삼동면장과 도평의원으로 삼동 영지양조장을 운영하였고 지금의 삼동면사무소를 지족으로 옮겼다. 고(故) 최치환 의원의 최대 후원자로 돈독한 유대를 이어 왔었다.

외증조부 최효석 선생이 설립한 이동초등학교는 박희태 전 국회의장님을 비롯, 고인이 되신 조주영 체신부장관, 최치환 국회의원, 김일두 검사장, 최익명 남해고등학교 재단이사장님을 배출한 최고의 명문학교이다.

외증조부께서는 민족주의자 면암 최익현 선생의 수제자로 이동초 100년사에 상세히 공적기록이 남아있다. 향교 전교를 지낸 친조부님(이시봉)께서는 지금의 다초초등학교 부지를 제공하였고, 지금의 이동 장평소류지 건립에 기여하여 대로변의 큰바위 <마애비>와 벚꽃나무 아래 큰 바위에 공적기록이 남아있다.

조부님은 자수성가로 이동 다초리에 양조장과 남해읍 차산리에 도정공장과 염전을 하였고, 그런 재력으로 숙부와 아버지는 일본 유학을 하게 되었다. 예전에 선소와 차산리 일대에 토마토 재배가 많은 것은 아버님께서 20대에 남해공립 농업중학교 교감으로 최초로 남해에 토마토를 재배 보급한 때문이다.

이러한 이환성 회장의 가정은 6·25로 인해 행복이란 단어를 잃었다. 강창호 전 재경향우회 회장님께서 아버지의 수제자로 함께 납북되다가 탈출했기에 이 회장을 볼 때마다 안타까워했었다.

이런 DNA를 물려받았는지, 이 회장은 1968년부터 1970년까지 청와대에 근무할 때에 많은 향우와 지인들을 도울 수 있었다. 특히 남해 최고층 현대APT는 우리나라 소지방 특히 도서지방에 최초로 현대그룹에서 직접 시공해 ‘현대마크’를 붙인 곳으로 지진에도 끄떡없고 벽에 못질도 힘들게 자재를 넉넉히 튼튼하게 지어 이익은 없으나, 남해읍 입구의 랜드마크로서 특히 평생 고생하신 어머니의 생을 마칠 때까지 계실 수 있게 한 것이 보람이라고 하였다.

이렇듯 이환성 회장 가문은 우리 고장에서 선대로부터 후학을 위해 교육자로서 학교설립과 지역발전에 기여한 흔적이 남아있으며 임진왜란 때 관음포에서 이순신 장군과 등자룡 장군 유허비 설치는 아직 미완성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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